체르노빌의 목소리 - 미래의 연대기

스베틀리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 김은혜 옮김 | 새잎 | 2011년

 

 

“적으라, 받아 적으라. 기억에서는 다 지워질 테니.”(215쪽)

 

체르노빌. 1986년 4월 6일,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의 4호 원자로가 몇 차례 폭발 후 무너졌다. 벨라루스. 인구 1천만 명의 농업 국가로 원자력 발전소는 하나도 없다. 사고 당시 바람의 방향 때문에 배출된 방사성 물질의 70퍼센트가 벨라루스 영토에 도달했다. 오늘날 국토의 23퍼센트가 오염되었고 국민의 5분의 1이 오염 지역에 거주하고 있다. 오염 지역 거주민 210만 명 중 어린이가 70만 명이다. 피해 규모. 그린피스 추산으로 9만 명 이상이 사망했다. 암으로 인한 사망은 9만 3천 건이다. 영국 『인디펜던트』지에 따르면 체르노빌 사고로 인한 사망자는 20만 명에 이른다. 2005년 유엔 발표에 따르면 암 발생 건수는 4천~9천 건에 불과하다.

 

체르노빌 원자력 발전소 사고 이후 20여 년에 걸쳐 사고와 관련된 사람들을 인터뷰하여 모은 책이다. 이 작은 책에 정말로 많은 것이 들어 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언어들은 하나같이 시적이고 철학적인 아우라를 거느리고 있다. 체르노빌은 참조할 만한 그 어떤 선례도 없었다. 그 원인을 무언가에 돌리기엔 그것들이 초래한 결과에 대조하니 너무나 빈약했다. 그들은 언어의 무력함을 느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질문은 근원적일 수밖에 없었고, 그들의 고통은 시적인 언어로밖에 담아낼 길이 없었던 것이다. 그들의 이야기를 옮겨 적은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이렇게 말한다. "예술이 지금껏 지구의 종말을 그려냈지만, 우리의 삶보다는 기이하지 않다"고."(이계삼, "부산 핵발전소 사고! 대통령의 행방은?", 프레시안, 2011년 9월 16일.)

 

이 책을 읽고 나서 쓰는 서평은 대개 다음과 같은 내용을 담을 것이다. 응당 그래야 한다는 듯 이 슬픈 사연을 요약해 독자에게 들려주고, 사건의 원인을 설명해 준 다음, 이것이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사실을 일깨워 윤리적인 의식과 책임감을 요구하는 것이다. 2011년 3월 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지적하는 것도 빠지지 말아야 한다. 독자는 글을 읽으며 대개 충격, 슬픔, 분노, 두려움의 순서로 감정을 경험한다.

그런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그런 일이 독자의 마음에 일어나지 않는다면? 이것을 무감각이라고만 말할 수 있을지 의심이 들었다. 까페 밖으로 한가롭게 데이트를 즐기는 연인들이 오가고, 독자는 볕 좋은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다. 말을 잃게 만드는 이야기에 정신없이 빠져 들다가도 고개를 들면 평화로운 세계가 눈앞에 있다.

그래서 이런 책을 읽을 때마다 내게 흥미로운 문제는 이런 것이다. 독자와 책, 나와 『체르노빌의 목소리』, 인간과 글의 관계 같은 것. 한 편씩 서평을 쓰는 일이 나와 책 사이에 일어나는 일, 한 인간과 책 사이에 일어나는 일의 구체적인 사례라는 생각이 들었고 읽는 일 자체에 대해서 생각하는 일이 늘었다.

사람들은 왜 세상의 고통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 걸까? 그들의 부족한 지성이 감수성의 영역을 확장해 주지 못하는 것이라고 치부할 수 있을까? 알면 달라지는가? 우리는 언제나 동일한 강도로 타인의 고통에 자신을 이입하는가? 체르노빌과 후쿠시마에 무관심한 내가 우리 사회의 노동 문제에 무관심한 대다수 시민들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포로수용소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촬영한 적이 있다. 보통 그들은 만나기를 꺼린다. 다 같이 모여 전쟁을 회상하는 게 부자연스러웠다. 서로 죽이고 죽은 기억을 떠올리는 것이……. 모욕을 배우고, 겪으며 살아온 사람들이다. 이들은 서로에게서 도망 다닌다. 자신에게서 도망친다. 사람에 대해 알게 된 것으로부터 도망친다. 사람 속에, 살갗 아래에 뭐가 있는지……. 그래서 바로 이러한 이유로, 그곳 체르노빌에서도 무슨 이야기가 하기 싫은지 알게 되었다. (…) 긴급한 상황이 닥치면 사람은 책에 나오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책에서 읽은 사람들은 찾지도 못했고 보지도 못했다. 다 반대였다. 사람은 영웅이 아니다.”(173쪽)

 

윤리의 문제를 별개로 할 때 이 책이 흥미로운 점은 재난 자체에 대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는 점이다. 원자력 발전소 폭발 사고를 막고 원자력 발전소를 없앤다고 해도 자연재해는 인간이 아직 막을 수 없는 것이며, 언제 어디서 예상치 못하게 재난을 불러온다. 책을 읽으면서 재난이 인류에게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보편적인 경험이자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난을 다룬 책에도 새롭게 관심이 갔다.

체르노빌은 인간이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종류의 재난이다. 체르노빌 폭발 직후 소련 지도부를 비롯해 군대와 행정 기구의 관료들은 당시 상황을 전쟁과 같은 것으로 이해했고 그러한 틀 안에서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하고 대처해 나갔다. 우리를 위협하는 '적'이 있고 그것을 막으면서 민간인을 대피시키는 식으로 말이다. 그런데 체르노빌에서 ‘적’은 방사능이었고, 인간의 감각으로는 인지하기가 불가능한 적이었다. 방사능이 미친 피해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말을 끊는다) 그래서, 체르노빌에 대해 뭘 아시나요? 무슨 글을 쓰시겠어요? 미안해요. (침묵한다) 내 영혼을 어떻게 적을 수 있어요? 나도 그렇게 자주 읽지 않는데…….”(324쪽)

 

인터뷰는 희곡의 지문처럼 쓰였다. 괄호 안에 '(말을 끊으면서 한다)', '(숨이 찬다)', '(오랫동안 침묵한다)'로 인물의 모습을 묘사한다. 계속해서 이어지기만 하는 말이 아니라 한 사람의 침묵과 한숨을 듣게 될 때 독자로서 내가 위치한 지점이 뒤흔들리는 느낌이 있었다.

저자의 말대로, 이 책은 시적이다. 시집이다. 우리가 겪었지만 아직 겪지 못한 미래 같은 느낌, 아직 설명하지 못한 세계가 이 안에 있는 듯했다. 

 

 


체르노빌의 목소리

저자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 지음
출판사
새잎 | 2011-06-07 출간
카테고리
정치/사회
책소개
체르노빌은 우리의 미래다! 2006년 미국 비평가 협회상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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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월간 이리> 3월 호.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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