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저기서 소문을 많이 들었던 소설. 절친한 친구가 뒤늦게 생일을 챙겨주는 걸 미안해하며 마음에 드는 책을 고르면 선물로 사주겠다길래, '돈키호테'와 이 책 사이에서 고민하다 한국 작가의 책으로 결정했다.
수상 이후에 여러 문학 잡지에 꾸준히 글을 발표해 왔는지는 모르지만, '작가 김언수'의 소설책은 이 책이 유일하다. 책이 나온지 2년이 넘었는데, 이제 슬슬 소설집이라도 하나 나올 때도 되었거만, 감감 무소식인 모양이다. 책 뒤편 작가의 말을 보면 이런 구절이 있다. '나는 가끔씩 물어본다. 너는 자장면 한 그릇만한 소설을 쓰고 있느냐? 너는 네 소설로 단 한 번이라도 사람들의 마음을 맛있고 풍요롭게 해준 적이 있느냐? 그 질문을 생각할 때마다 마음이 참담하다. 아! 나는 어쩌자고 여태껏 자장면은커녕 단무지만도 못한 소설을 쓰고 있는 걸까. 어쩌자고,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생각을 품고 펜 대를 쥐기로 마음먹었다는 건 독자의 입장에서는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내가 작가라면 스트레스 엄청 받을 것 같다. 엄청나게 높은 기준을 자기 스스로 세워두고 있는 거 아닌가. 스스로를 만족시킬 수 있는 소설을 써내는 작가가 얼마나 될까. 다들 자기 보기에는 아직도 고칠 부분이 많고 미흡한 점이 많은데, 더 이상 손을 댈 수 없을 때에야 비로소 원고를 넘기는 거 아닐까.
심사위원 12인이 만장일치로 이 소설을 선택했단다. 나까지 포함해서 13인 이었어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 그래서 그의 책이 더 나오지 않는 것을 이토록 아쉬워하는 거다.
소설은 흥미진진하고 재밌다. 작가의 문체는 매력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소설이 갑작스럽다 싶을 정도의 찬사를 받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상상력'이다. 놀라울 정도로 흥미로운, 그러나 어딘가 익숙해보이는 세계.
'심토머(Symptomer)'라 불리는 사람들, 도시를 비롯한 현대 지구의 환경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인간이라는 종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들은 사실상 나와 너를 비롯해 불행하고 결핍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과 다르지 않다. 어릴 적 가족에게서 받은 상처, 불안한 가정 환경, 인생에서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 등은 그 인간을 회복하기 힘든 상처의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 소설에 등장하는 심토머들은 그런 불구들이다. 다만 그들은 현실에 영향을 주는 어떤 '능력' 혹은 '특성'을 갖게 되었다. 엑스맨 같은 능력이 아니다. 오히려 그들의 삶을 고달프게 하는 기묘한 능력들이다. 손가락에서 은행나무가 자란다거나, 시간이 '사라진다'거나, 어느 날 갑자기 2년 이상 잠든다거나, 등등.
세계가 워낙 흥미로우면서도 기묘하고 정교하다 보니 그 밖의 부분이 조금 미흡하긴 하다. 심사위원들도 대체로 칭찬에 이어 아쉬운 점이 있다고 사족을 달곤 하더라. 개인적으로는 주인공인 공대리의 모습의 변화가 조금 어색한 느낌이었다. 처음에는 그저 심심함을 못 견디는, 평범하지만 생존에 절실한 20대 청년의 모습이었는데, 뒤로 갈수록 주관이 뚜렷해졌고 더욱 이기적인 인물로 등장했다. '손정은'이라는 여성이 결말 부분에 가서는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한 것도 조금 의아했다.
'심토머'들은 현대 사회에 대한 아주 흥미로우면서도 날카로운 은유나 다름없다. 동시에 그들은 단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받고 있는 장애인들과도 비슷하고, 모두의 속도에 맞추지 못해 하나둘 낙오되어가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도 비슷하다. 그래서 이 기묘한 사람들이 남 같아 보이지 않는다.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삶이 있지. 일기를 쓰는 삶과 일기를 쓰지 않는 삶. 그것은 역사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만큼이나 삶의 모든 것에 큰 영향을 미친단다. 수잔, 너는 어떤 삶을 택하겠니?" (98쪽)
"...저는 고향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이 누구인지 알고 싶다면 가끔씩은 고향을 잊어버리고 유목민이 되어야 하죠." (179쪽)
"혹시 그런 문제입니까? 사람들 속에서 외롭다거나, 혹은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느끼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편이에요."
"아무에게도 이해받지 못한다고 생각하시고요?"
"아뇨, 저는 사실 그 반대 입장입니다."
"반대 입장이라뇨?"
"우리는 사실 서로를 너무 잘 이해하고 있는 거죠. 그런데 별 도리가 없는 겁니다. 그건 이런 말이죠. 당신 외로운 것 알아. 당신도 나만큼은 외롭겠지. 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그래서 우리는 외로워지는 거죠. 결국 같은 말이지만." (286쪽)
"...퇴근길의 지하철 속에서 사람들은 너무나 지치고 황량한 모습으로 꾸벅꾸벅 졸거나, 무표정하게 광고판을 바라보죠. 그리고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서로의 얼굴을 민망하게 바라봐요. 하지만 도시에서 상대방의 얼굴을 오랫동안 바라보는 것은 실례잖아요. 그래서 그들의 얼굴과 시선 사이를 피해다니다보면 마치 비좁은 관 속에 들어가 있는 시체가 된 기분이에요." (2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