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쿤데라커튼소설을둘러싼일곱가지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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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밀란 쿤데라 (민음사,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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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에 쓴 책이다. 얼마 안 된 책. 거장이 삶의 말년에 소설에 대해 쓴 책이다. 우연히 누군가에게 빌려 읽었다. 나는 그곳에서 이런 책을 들고 다니는 사람이 있을 줄 상상도 못했다. 읽으면서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수첩에 마음에 드는 구절을 옮겨 적고, 할 일이 생길 때마다 끄적이는 책상 위 노트에도 옮겨 적었다. 화장실 변기 위에 앉아 일을 보며 수첩을 펴들고 다시 읽었다. 갑작스럽게 소설이 문장이 내 하루에 성큼성큼 등장했다. 여전히 나의 하루들은 답답하고 재미없고 괴로웠지만.
세르반테스, 곰브로비치, 브로흐, 등등등, 내가 모르는 옛 유럽의 소설가들의 이름이 자주 거론되고 그들의 작품 역시 대부분 낯설었다. (유럽)소설에 대해서 이렇게 근원적이고 역사적으로 탐색한 결과물은 거의 처음 접해본 것 같다. 플로베르와 그의 작품은 격찬의 대상이었고 마르케스 역시 그러했다. <백년 동안의 고독>에 쿤데라는 아낌없이 찬사를 보낸다. 
한국에서는 접하기 힘든 글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움, 파격, 내용보다 형식에 주목함, 구성, 세계 문학에 대한 기여, 등등. 좀 더 큰 틀에서 바라본달까. 소설 하나하나를 두고 자신의 삶과 엮으며 알콩달콩 시시콜콜 서정적인 분위기로 끄적여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만, '서사-희극-산문적인 글쓰기', 소설의 본질에 대해서도 고민해보고 그 미래를 걱정하며 이 예술의 역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애정이자 예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체코의 20세기 역사가 작가의 삶에 미친 영향이 어마어마하다는 걸 새삼 알 수 있었다. 조국이 멸망해 가는 모습(그 당대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기가 힘들었을 착각)을 목격한다는 것이 한 사람의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쳤을지, 미처 생각해 보지 못했다.

길고 긴 구절들을 모두 옮겨 적었다. 굵은 글씨는 모두 내가 표시해놓은 것이다.

묘사 : 일시적인 것에 대한 연민, 소멸적인 것에 대한 구원. 27쪽

항상 우리와 함께 있기 때문에, 예술 작품의 가치는 끊임없이 의심되고, 옹호되고, 판단되고, 재판단된다. 그러나 어떻게 판단하는가? 예술의 영역에는 이를 위한 정확한 기준이 없다. 각각의 미학적 판단은 개인적인 판단의 몫이다. 그러나 자기 주관성에 갇혀 있지 않고, 다른 판단에 맞서는 하나의 판단은 인정받고자 하며, 객관성을 열망한다. 집단의식 속에서 소설의 역사는 라블레부터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내내 이렇게 영속적인 변형 속에 있다. 이 변형에는 능력과 무능력, 지성과 무지, 그리고 무엇보다도 '망각'이 참여한다. 망각은 무가치 옆에서, 평가 절하되거나 인정받지 못하거나 잊힌 가치들이 잠들어 있는 자신의 묘지를 넓히기를 멈추지 않는다. 이렇게 필연적인 불공정성이 예술의 역사를 극도로 인간적인 것으로 만들고 있다. 30~31쪽

예술은 모두 같지 않다. 그것들 각각이 세계에 도달하는 것은 서로 다른 문을 통해서다. 이 문  가운데 하나는 전적으로 소설의 몫이다.
나는 '전적으로'라고 말했는데, 이는 소설이 내게는 하나의 '문학 장르', 나무의 여러 가지들 가운데 하나가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그 고유한 여신을 부정하거나, 소설에서 고유한 독특함이나 독자적인 예술은 보지 못한다면, 소설에서 아무것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 소설은 자신만의 도덕을 갖고 있으며(헤르만 브로흐는 이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소설의 유일한 도덕은 인식이다. 실존의 그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어떠한 단면도 발견하지 못하는 소설이 곧 비도덕적이다. 그러므로 '사물들의 핵심에 도달하는 것'과 훌륭한 모범을 보이는 것은 양립할 수 없는 서로 다른 두 의도다.) 작가의 '자아'와 특수한 관계에 있으며('사물의 영혼'이 내는 잘 들리지 않는 은밀한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 소설가는 시인이나 음악가와는 반대로 자신의 영혼의 외침을 침묵할 수 있게 해야 한다.) 창조의 지속적 순간을 지니며(소설 쓰기는 작가의 삶에서 한 시기를 차지하고 있어 작업이 끝나고 나면 작가는 시작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르게 된다.) 모국을 뛰어넘어 세계로 열린다.(유럽 시에서 리듬에 각운이 덧붙여졌을 때부터 더 이상 한 시구의 아름다움을 다른 언어로 옮길 수 없게 됐다. 반대로 산문에서 작품의 충실한 번역은 힘들기는 하지만 가능하다. 소설의 세계에는 국가의 경계가 없다. 라블레를 표방하는 위대한 소설가들은 거의 모두 그의 작품을 번역으로 읽었다.) 87~88쪽

오래 전부터 나는 젊은 시절은 서정적 시기라고 생각해 왔다. 다시 말해서 한 개인이 거의 전적으로 자기 자신한테 집중하고 있어서 주변 세계를 보지도, 이해하지도, 명료하게 판단하지도 못하는 시기라고 말이다. 이러한 가설(필연적으로 도식적일 수밖에 없는 가설이지만 도식으로서 내가 보기에는 적절한 가설)을 근거로 보자면, 미성숙에서 성숙으로의 이행은 서정적 태도에서 벗어남을 의미한다.
소설가의 형성 과정을 표본이 될 만한 이야기의 형태, 즉 '신화'의 형태로 상상해 보니, 이 과정은 개종에 관한 이야기로 드러는다. 사울은 바울이 된다. 소설가는 자신의 서정 세계의 폐허 위에서 태어난다. 121쪽

작가는 자신의 삶을 말하려고 소설을 쓰지 않는다. 그는 독자의 면전에서 그들의 삶을 밝게 비춰주고 싶어서 글을 썼던 것이다. "... 독자는 독서하는 순간 자기 자신에 대한 고유한 독자가 된다. 작가의 작품은 일종의 광학 기구에 불과하다. 작가는 이 기구를 독자에게 줌으로써 이 책이 없었다면 아마도 자기 자신 안에서 볼 수 없었을 것을 알아볼 수 있도록 돕는다. 독자가 책이 말하는 것을 자기 자신 안에서 인정하는 일은 진실과 대면하는 것이다. ..." 프루스트의 이 문장들이 오로지 프루스트 소설의 의미만을 밝혀주고 있지는 않다. 더 넓게 소설이라는 예술을 아주 간단하면서도 명료하게 정의내려 주고 있다. 132쪽

리자흐는 관료주의를 비난하지 않는다. 단지 있는 그대로, 그가 왜 그 일에 인생을 바칠 수 없었는지를 설명할 뿐이다. 그가 관리가 될 수 없었던 것은 자기의 지평선 너머에 있는 목표에 복종하고 그것을 위해 일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이다. ...
리자흐는 실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는 그 목적을 이해할 수 있는 일만 하면 되는 삶을 갈망한다. 이름과 직업과 집과 아이들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만 만나는 삶. 아침, 정오, 태양, 비, 폭풍우, 밤과 같이 시간이 늘 감지되며 그 구체적인 모습 속에 향유되는 삶. 183쪽

속지의 질감은 좋았으나 그리 길지 않은 분량의 책을 굳이 양장본으로 만든 이유는 잘 모르겠다. 물론 튼튼하고 오래 가서 좋긴 좋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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