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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출판사, 별로 좋아하지 않는 번역가. 짧은 시간동안 이렇게나 많은 작품을 번역하는 게 과연 가능한 일인가? 좀 의심스럽다. 건축학자 '승효상'씨가 생각난다. 건축학을 전공하는 한 친구에게서 들은 이야기. '승효상'은 개인의 이름이 아니라 일종의 브랜드, 기업의 이름인 셈이라고. 그 밑에서 고생하는 많은 젊은이들의 이름은 그 거장의 이름 아래 뭉개져 있다고. 게다가 이 번역가, '교수'라지 않나. 사실 무근의 억측이자 음모론.
책 자체의 번역은 괜찮다. 원제는 Discovering a Forgotten Passion in a Paris Atelier. 번역을 참 잘했다. 영어 원제를 보면 이 책이 어떤 이야기를 할지 너무 쉽게 알 수 있어 오히려 재미없어 보이기도 하고. 표지 디자인도 마음에 든다. 여러 면에서 '잘' 만든 책이다. 그런 책 윗 등에다 커피 자국을 남겨 버렸으니, 이것 참.
피아노에 대해서는 하여간 하나도 아는 게 없다. 페달부터 시작해 현과 캐비닛의 재료가 되는 나무들(기억나는 이름이 하나도 없다!), 해머라든가, 슈팅글과 스타인웨이 등등의 피아노 회사들, 심지어 업라이트와 그랜드 피아노의 차이점까지, 이 책에서 처음 알게 된 게 한두가지가 아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라 실화이고, 일종의 기행문이자 산문집이다. 저자의 국적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도 중동 지역 출신이 아닐까 싶다. 유럽에서 어린 시절을 보내고 미국서 젊은 시절 연애 컨설턴트로 일하다 다시 프랑스 파리로 이주해온 30대 중반 쯤 되는, 글을 쓰며 아이를 기르는 '미국인' 남자. 프랑스인들의 삶, 그 비밀스러운 공동체에 발을 들여놓게 된다. 동네에 있는 허름한 피아노 공방.
문장은 부드러우며, 저자의 어린 시절 이야기도 간간이 들려 준다. 그리고 피아노의 역사라든가. 피아노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아주 재밌게 읽을 것이다. 나는 어린 시절 다녔던 피아노 학원에 대해 좋지 않은 기억만 남아 있고, 그 이후로 피아노를 건드려본 적도 없기 때문에 열정 가득한 피아노 이야기를 경청하기만 했다. 그러나 나이가 든 뒤 다시 악기를 배우고, 음악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고, 그 이전과 이후의 삶이 확연히 달라졌다는 고백은 참 감동적이었고 부러웠다. 악기를 배운다는 것, 그리고 남에게 보여주기 위한 음악이 아니라 홀로 연주하는 음악이 주는 행복감에 대해서는 귀중한 교훈을 얻은 듯 했다.
뭐랄까, '잘- 만든' 책 이라는 표현이 떠오른다. 그리고 프랑스 / 파리 / 피아노, 셋 중 하나라도 좋아하는 지인에게 선물하기 딱 좋은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