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역시 시민들이 선물해준 책. 표지 사진이 인상적이다. 직접 보여줄 수 없어 아쉽다(그럴 만한 사정이 있다). 아마도 흰머리 노신사가 러셀인 듯 하고, 팔짱을 낀 히피 풍의 임신한 여성은 그의 두번째 부인인 것 같다. 참 보기 좋은 사진이다. 흰머리 노인네의 지혜로운 듯 하면서도 여유롭고 행복해 보이는 미소. 속 표지의 무늬도 무척 마음에 든다.

대체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정복'이라는 단어에 대해 거부감을 느낄 것이다. 실제로 러셀은 이 책의 제목을 Conquest Of Happiness 라고 지었다. 책 앞머리에서 제목의 의미를 설명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은 한 인간이 행복해지는 데에는 외부적(환경적) 요인과 내부적(심리적) 요인이 모두 결정적이라고 생각한다, 이 책에서는 내부적 요인에 대해서만 쓰겠다, 이는 한 개인의 노력으로 변화 가능하며 또한 내부적 요인의 개선 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행복을 두고 '정복'이라는 단어를 쓰겠다'.
책의 구성은 아주 간단하다. 1부에서는 인간을 불행하게 하는 원인들에 대해 서술한다. 자기중심주의, 질투, 걱정, 두려움, 죄의식, 권태, 등. 2부에서는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요소들, 사랑, 열정, 노동, 부모 되기, 폭넓은 관심 등을 다룬다. 어쩌면 이렇게 간단 명쾌할 수 있나 싶다. 구성 뿐만 아니라 내용도 그렇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주제는..' 이런 식으로 자주 주장의 범위를 단도리한다. 오지랖 넓게 사람 마음 전부를 다루려 하지 않는다. 그 복잡한 낭떠러지를 이해하여 설명하려 하지도 않는다. 수학자이자 철학자로서, 인류사 가장 다사다난했던 시기를 살아온 한 사람으로서, 자신의 경험과 보고 들은 경험을 통해 알게 된 것들로만 이야기를 풀어 나간다. 그래서 기묘하게도 아주 '실용적'이다.

부모에게 사랑받고 있는 아이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아이는 자신의 행복에서 중요한 의미를 차지하는 부모의 사랑에 대해서 많이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아이는 세상에 대해, 자신이 하고 있는 여러 가지 모험에 대해, 그리고 어른이 되어서 마주치게 될 더 신나는 모험에 대해 생각한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외부적 관심의 밑바닥에는 부모의 사랑이 자신을 재난으로부터 보호해주리라는 믿음이 있다. 어떤 이유 때문에 부모의 사랑을 받지 못하는 아이는 겁이 많아지고, 모험심이 부족해진다. 이런 아이는 두려움과 자기 연민의 감정에 빠져 신나는 모험을 하는 기분으로 세상에 나설 수 없게 된다.

이런 세상에서 이해할 수 있는 체계나 양식을 뽑아내려고 하는 욕망은 본질적으로 일종의 두려움의 소산이며, 광장이나 공개적인 장소에 대한 공포에서 비롯된 것이다. 겁 많은 학생은 자기 방의 네 벽에 둘러싸여 있어야만 안심한다. 만일 우주가 자신의 방과 마찬가지로 질서정연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면, 이 학생은 용감히 거리에 나서야 할 때에도 똑같은 안정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사람이 만일 더 많은 사랑을 받았더라면 현실 세계에 대한 두려움을 덜 느꼈을 것이고, 마음속에 현실 세계를 대체할 만한 이상적인 세계를 꾸며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193~194쪽 

저자는 뿌리 깊은 불안, 두려움, 질투, 걱정,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고 살아가는 마음병을 실제로 치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물론 심각하면 정신과에 가야 한다). 그 치유책들이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한 이유는 러셀이 인간의 '이성' 혹은 '의지'에 대해 아주 강력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을 강력하게 설득한다거나, 무의식의 영역에 개입하는 데에는 의식을 강화하여 몇 번이고 다짐하고 결심하면 된다거나. 지금 당장 피부에 와닿진 않는다. 그러나 곰곰히 생각해 보면, 내 안에 있는 질투심 두려움 열등감 등등을 치료하기 위해 정신과에 갈 것 같진 않다. 아마도 평생 친구들에게나 가끔 털어 놓고 말 것이다. 글을 써본다던가. 그러므로 러셀의 충고는 내게 가장 현실적이다.

외부적인 대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것 역시 그 나름대로 고통을 부를 수 있다. 세상이 전쟁의 구렁텅이로 떨어지기도 하고, 어떤 분야에서 지식을 습득하는데 어려움을 겪기도 하고, 친구들이 죽기도 한다. 하지만 이런 종류의 고통은 자신에 대한 혐오로 생기는 고통과는 달리 삶의 본질적인 부분까지 파괴하지는 않는다. 외부에 대한 관심은 어떤 활동을 할 마음을 불러일으키는데, 그 관심이 살아있는 한 사람은 결코 권태를 느끼지 않는다. 18쪽 

자기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면 자신의 자아는 세상에서 그리 큰 부분을 차지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자신의 생각과 희망을 자아를 넘어선 어떤 것에 집중할 수 있는 사람은 일상생활의 걱정거리 속에서도 어느 정도 평화를 얻을 수 있다. 81쪽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가장 귀가 솔깃했던 부분은 '자기중심주의'에 관한 것이다. 책 전체에 걸쳐 자주 이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론과 학문, 예술에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이 마음병을 조금씩 앓고 있다고 말한다. 자아, 자의식 의 문제는 지난 몇년 동안 나를 절대적으로 지배했다. 러셀은 이렇게 말했다. 자아에 집중하는 부분을 줄여 나가고 외부적인 문제, 일, 노동에 관심을 기울이며 성취감을 얻어나가야 행복해질 수 있다고. 나는 반대로 생각해 왔었다. 나에 대해서 쓸 게 많아야, 내가 더 넓어져야 세계도 재밌어질 거라고, 내가 강해져야 한다고, 내가 외롭지 않아야 한다고, 내 안에 무언가를 계속 해서 채워나가야만 한다고... 모두 '나'가 문제였다. 지긋지긋한 자의식.

이 책이 재밌는 이유 중 하나는, 저자의 생애와 깊은 관련이 있다. 러셀은 1872년에 태어나 1970년에 죽었다. 영국에서 살았다. 20세기 서구 제국주의의 '흥망성쇠'를 고스란히 목격한 생애다.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던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노벨 문학상도 수상했다. 천재다. 그리고 이 책은 1930년에 발표됐다. 그 암울한 시기에, 개인의 내면에 주목하여 행복을 '정복'할 수 있다는 주장을 담아! 당시 사회주의자들은 아주 그냥 코웃음을 치고 말았을 것이다. 그럴 만도 하지. 대공황이 막 시작되어 가는 참이었으니까. 가난하고 배가 고픈 실업자들이 거리에 넘쳐나는 판국에. 내 짐작에 이 책을 쓸 당시만 해도 아직 대공황과 전쟁의 기운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1930년은 러셀이 이제 막 인생의 반절을 살아온 때였다. 거의 백년을 산 영감님이 자기 인생의 반환점을 막 지났을 때 쓴 책. 그러므로 내가 궁금해지는 것은 그가 여든이나 아흔이 되었을 때라면 더 훌륭한, 더 통찰력 있는 행복론을 써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 고작 인생의 '절반' 뿐이니까 말이다. 

우리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짧은 일생 동안, 이 이상한 행성과 이 행성이 우주 안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 것은 무엇이든 습득해야 한다. 비록 불완전한 지식이더라도, 그것을 얻을 수 있는 기회를 무시하는 것은, 극장에 가서 연극에 귀를 기울이지 않는 것과 같다. 세상은 비극적이거나 희극적인 것, 영웅적이거나 기괴하고 놀라운 것들로 가득 차 있다. 세상이 보여주는 이러한 구경거리에 흥미를 갖지 못하는 사람은 삶이 베푸는 여러 특권 중의 하나를 포기하는 셈이다. 240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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