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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식 선생의 '디아스포라 기행'을 읽고 샀다. 그 전부터 알고 있었고 그래서 yes24 카트에도 올려 놓았지만 결정적으로 책을 구입한 것은 '디아스포라 기행' 때문이다.
책 편집이 깔끔해서 무척 좋았다. 책에 실린 네 개의 부록 - '독자들에게 답한다', '프리모 레비 연보', '아우슈비츠 수용소', '작품 해설' - 도 큰 도움이 됐다. 특히 프리모 레비 본인이 작품이 발표된 후에 쓴 '독자들에게 답한다'와 서경식 선생이 쓴 ' 작품 해설'은 본문 만큼이나 마음에 들었다.
지금 이 시간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과, 얼마 전 인터넷에 올라와 많은 사람들에게 공포와 자신의 종(인간)의 미래를 심각하게 회의하게 만들었던 그 사진 - 미사일과 포탄이 터지는 장면을 좀 더 잘 보기 위해 전쟁터 근처의 야산에 올라가 망원경을 들고 해맑게 웃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모습 - . 이스라엘과 그 나라 국민들 중 다수가 만들어내는 참혹한 장면을 지켜보면서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라는 타이틀이 나에게는 그다지 큰 호소력을 갖지 못하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프리모 레비는 1982년 어느 언론과 인터뷰에서 자신과 같은 유대인들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다. 2천여년 만에 자신들의 조국을 가지고 그 땅에서 살아가는 대다수의 유대인들은 더 이상 '디아스포라'가 아니다. 프리모 레비가 이스라엘이 저 먼 땅에 있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디아스포라 유대인'이라고 불렀던 것은, 자기 민족의 조국이 지극히 부당한 과정을 거쳐 세워졌다는 것, 조국의 존재 자체로 인해 수많은 팔레스타인인들이 고스란히 고통스러워하고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프리모 레비의 책을 읽어봐야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었다.
프리모 레비는 '아우슈비츠'(이 단어는 2차대전 당시 독일이 세운 수용소들의 대명사라고 보면 된다) 인근의 모노비츠 수용소라는 강제노역수용소에서 1년 조금 넘는 시간을 보냈다. 전쟁 전엔 인문학적 소양이 풍부한 화학도였고, 2차대전 중 무장 게릴라 투쟁에 참여했다가 몇달 지나지 않아 붙잡혀 수용소로 이송되었다. 그는 아주 건강하다고 볼 수는 없는 20대 중반의 평범한 남자였다. 수용소 생활이 중반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몇 가지 커다란 행운이 찾아왔고 그는 그 덕택에 살아남을 수 있었을 뿐이다. 만약 그 행운들이 아니었다면 90% 이상이 학살당한 아우슈비츠에서 그 역시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 본인이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은, 그냥 '운'이었다는 사실.
소설이 아니라 저자 자신의 경험담을 적나라하게 기록한 산문집이다. 그러나 책 전체를 관통하는 서사가 아주 듬직하게 자리잡고 있다. 단테의 '신곡'을 다양하게 인용하고 있으며 서사 구조도 유사하다. 단테가 베르길리우스(이성을 상징하는 인물)의 인도로 지옥에서 생환했다면 프리모 레비는 단지 운과 그의 절친한 친구 알베르토, 그리고 '로렌초'라는 인물, 이 모든 것을 가능케 했던 '행운' 덕택에 생환할 수 있었다.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들의 다른 책을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 책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었던 것은, '인간' 자체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그의 사색은 제목이 그렇듯 '이것이 인간인가'라는 화두를 품고 있다("이 책은 새로운 죄목을 찾아내려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 정신의 몇 몇 측면에 대한 조용한 연구에 자료를 제공하기 위한 것이다", 6쪽).
인간이라는 종은 각각의 개체마다 워낙 특징적이므로 종 전체의 본성이 존재하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쨌든 '우리'는 같은 '종'이다. 서로 대화할 수 있고 눈빛으로 어떤 것을 소통할 수 있는 같은 종이다. 우리 인간이라는 종은 지구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거주지를 스스로 파괴하는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또한, 거의 모든 생명은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만 다른 생명을 살해한다. 물론 같은 종을 죽이기도 한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과 같은 종을 자신의 '생존'과는 아무 관계없이 대량으로 살해하기 위해(물론 역사에서 이와 같은 경우에 가해자들은 대체로 피해자들을 인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들의 지성을 충분히 활용하여 '수용소'라는 거대한 죽음의 구조물을 만들어냈다.
개별적으로든 집단적으로든, 많은 사람들이 다소 의식적으로 '이방인은 모두 적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러한 확신은 대개 잠복성 전염병처럼 영혼의 밑바닥에 자리 잡고 있다. 그것은 우연적이고 단편적인 행동으로만 나타날 뿐이며 사고체계의 밑바탕에 깔려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암묵적인 도그마가 삼단논법의 대전제가 되면, 그 논리적 결말로 수용소가 도출된다. 수용소는 엄밀한 사유를 거쳐 논리적 결론에 도달하게 된, 이 세상에 대한 인식의 산물이다. 이 인식이 존재하는 한 그 결과들은 우리를 위협한다. 죽음의 수용소에 관한 이야기는 모든 이들에게 불길한 경종으로 이해되어야만 할 것이다. (작가의 말, 6~7쪽)
나는 이 부분, 특히 굵은 글씨의 문장이 매우 충격적이었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더욱 그랬다. 수용소는 야만적인 인간들의 우연적인 행위가 아니었다. 그러므로 다수의 인간들이, 특정 정체성을 공유하는 소수의 인간들을 자신과 같은 종(인간)이 아닌 다른 무엇(독일인이 유대인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 한국전쟁 기간과 그 이후 대다수 한국인들이 빨갱이들을 그렇게 생각했던 것처럼)으로 인식할 때 수용소는 '필연적인' 결과물이었던 것이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더구나 수용소는 이 분야에서 가장 효율적인 발명품임이 증명되었다. 소련 역시 수용소를 만들었다. 수용소가 자신의 적들을 가장 효율적으로 파괴할 수 있는 발명품이라는 것을 당시의 소련 지도부는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나 역시 인간이고, 지금껏 별다른 생존의 위협 없이 살아왔다. 내 한 몸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면서 '인간'이라는 거대한 개념을 이토록 깊이 고민하는 게 우습게 보일 수도 있다. 그래, 나도 알고 있다. 이렇게 거대하고 심각한 문제의 해결은 바로 내가 발딛고 있는 이 땅의 변화에서부터 시작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
그렇지만. 팔레스타인인들을 향한 살해 행위를 보다 더 잘 보기 위해 야산으로 올라가 해맑게 웃는 이스라엘인들의 모습을 보면서, 과연 '인간'의 미래에 희망을 가질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자꾸만 든다.
... 물질적인 도움 때문이라기보다는 그의 존재 자체가 나에게 끝없이 상기시켜준 어떤 가능성 때문이다. 선행을 행하는 너무나 자연스럽고 평범한 그의 태도를 보면서 나는 수용소 밖에 아직도 올바른 세상이, 부패하지 않고 야만적이지 않은, 증오와 두려움과는 무관한 세상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믿을 수 있었다. 정확히 규정하기 어려운 어떤 것, 선의 희미한 가능성, 하지만이것은 충분히 생존해야 할 가치가 있는 것이었다. (187쪽)
인간을 파괴하는 것은 창조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다. 쉬운 일도, 간단한 일도 절대 아니지만 독일인, 당신들은 그 일에 성공했다. 당신들의 눈앞에 온순한 우리가 있다. 우리 때문에 두려워할 필요는 전혀 없다. 반란 행위도, 도전적인 말도, 심판의 눈길조차 없을 테니까. (228쪽)
우리 존재의 일부분은 우리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 자리잡고 있다. 인간이 다른 인간의 눈에 하나의 사물일 뿐인 시절을 보낸 사람의 경험이 비인간적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 세 사람은 대부분 거기에 물들지 않았다. 우리는 서로에게 감사해야 한다. 이것이 샤를과 나의 우정이 지속될 수 있는 이유다.
그러나 우리 머리 위 수천 미터 상공의 회색 구름들 사이에서 비행기들이 공중전으로 복잡한 기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무기력하고 힘없고 헐벗은 우리들의 머리 위에서 우리 시대의 인간들이 가장 정밀한 도구를 이용해 서로의 죽음을 구하고 있었다. 그들이 손가락만 한 번 움직이면 수용소 전체가 파괴되고 수천 명의 사람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반면에 우리의 힘과 의지를 모두 다 합쳐도 우리들 중 한 사람의 생명을 단 1분도 연장할 수 없었다. (264쪽)
덧. 프리모 레비는 1987년 자살했다. 아내와 아이들이 있었다. 그는 데뷔작 '이것이 인간인가'를 시작으로 인간에게도 희망이 있음을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많은 작품을 발표했고, 젊은 세대를 위해 청소년판 '이것이 인간인가'까지 썼다. 그래서 전후,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많은 지식인들은 그의 노력을 보면서 인류에게도 희망이 있을 수 있다고, 위안을 얻곤 했다. 그런 그가 자살한 것이다. 그의 죽음을 우리는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