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기행(김승옥소설전집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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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승옥 (문학동네,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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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전에 리뷰 올린 책 '독고다이'에도 김승옥에 관한 글이 하나 있다. 이기호씨의 표현을 빌면 1960년대 한국 문단에 마치 서태지처럼 갑작스럽게 등장한 젊은 작가, 가 김승옥이었다고 한다. 고등학교 교과서나 문제집에도 실려 있어 '무진기행'이나 '서울 1964년 겨울' 정도는 왠만한 20대들도 알 것인데, 이 작품들을 모두 1960년대에 썼다.
12월 중순에 이 책을 사서 보름 정도 읽었는데 확실히 훌륭한 작품들이 많았지만 왜 하필이면 연말에 이 책을 집어들었나 하고 후회하기도 했다. 작품들 모두 암울한 풍경과 어두운 인물들을 이야기한다. 한 번 쥔 책은 왠만하면 다 읽을 때까지 손에서 놓지 않아서 어떻게든 다 읽어야겠다 싶은데 읽어나가는게 힘겨웠다. 언제 읽든 힘겨웠겠지만 연말은 연말이고 내 관계의 총량은 여전히 극도로 적었다.
작가는 1982년을 기점으로 소설을 쓰지 않고 있다. 유용주 시인이 고 박경리 선생의 생전 생일 잔치에 한창훈씨와 함께 갔다가 어린애처럼 즐거워하는 노 작가들을 보았다고 말한 적 있는데, 그 노 작가들 중에 김승옥도 끼어 있었다. 그가 소설을 그만둔 것은 소설이 싫어서라기보다 1982년 어느날 꿈에서 하느님을 만나고 또 얼마 뒤에는 그 하느님이 그에게 '인도로 가서 선교하라'라는 명령을 내려 기독교 공부와 선교에 열중하느라 소설을 쓰지 못했다고 한다. 나는 흥 하고 아주 코웃음을 쳤다. 꿈에서 하느님을 만난 게 계시라고? 꿈에서라면 무언들 만나지 못하겠나? 그게 하느님 같이 생겼다는데, 내 보기에는 걍 개꿈이지. 기독교인인 친구에게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는데 친구 말로는 "그 때, 그 시기에 그 사람은 그게 하느님이라고 믿고 싶어했을 것"이라고 대답해줬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말이다. 나는 수긍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나는 인도로 가서 선교하라 는 명령을 내린 인물이라면 더욱 더 하느님이라고 믿을 수 없다. 결정적으로 아쉬운 건 그래서 김승옥은 더 이상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점이다. 독자로서 무척 아쉽다.  

생명연습
건(乾)
역사(力士)
누이를 이해하기 위하여
확인해본 열다섯 개의 고정관념
무진기행
싸게 사들이기
차나 한잔
서울 1964년 겨울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
야행(夜行)
그와 나
서울의 달빛 0장
우리들의 낮은 울타리

 개인적으로 60년대 후반과 70년대에 발표한 작품들이 인상적이었다. 일단 무진기행 과 서울 1964년 겨울 도 확실히 뛰어난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두 작품은 마냥 음울하고 쓸쓸하기만 한 게 아니고, 어느 지점에서 가슴을 꾹 짓누르는 보편성이 있는 것 같다. '들놀이', '염소는 힘이 세다'도 멋졌는데 '서울의 달빛 0장'은 정말 와... 하는 감탄사를 오랜만에 튀어나게 하는 작품이었다. 스치면 아플 것 같은 거친 문체가 압권이었다. 알고보니 이 작품이 제1회 이상문학상이라고 한다. 이어령씨가 70년대 중반 들어 소설을 잘 쓰지 않는 작가를 호텔방에 가두어놓고 소설 한 편 써달라고 강요하다시피 해 써낸 작품이라고 하는데, 그리 길지 않은 시간과 강요 속에서 써낸 걸 고려해보면 확실히 보통 사람은 아니다.
앞의 60년대 작품들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아주 가난하고 지독하게 허무해하는, 혼자 사는 남자들이다. 60년대라고 하면 근현대사 속 역사의 문체로만 접해봤지 시대 속 대다수 개인들의 삶을 형상화한 예술은 보고 들은 기억은 거의 없다. 김승옥 소설을 통해 상상해볼 수 있는 60년대, 는 변태적이고 혼란스럽고 광기어린 시대였던 것 같다. 50년대의 풍파가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도시를 제외한 대다수 지역은 도로 포장도 제대로 되지 않은 궁벽한 농촌이었던 60년대에, 도시에서 살고 있는 청년들의 삶은 어떠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역사'에서 아주 재밌는 문장을 하나 발견했다. "창신동에 사는 사람들은 모두 개새끼들이외다". 이런 걸 변용하면 "도곡동에 사는 사람들은 대체로 개새끼들이외다"도 될 수 있지 않을까? 도곡동 사는 분들에게느 죄송한 말씀이다. 혹은 문장의 맥락에 충실하게 변용한다면 창신동이 아니라 신림동이나 월계동, 신월동 정도가 될지도 모르겠다.

어서 또 무엇을 붙들어야 한다. 오늘 중으로 무언가 확실한 건 붙들어둬야 한다. 어제와 오늘과 그리고 내일을 순조롭게 연속시켜주는 것을 붙잡아둬야 한다. (차나 한잔, 236쪽)

추억이란 그것이 슬픈 것이든지 기쁜 것이든지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을 의기양양하게 한다. 슬픈 추억일 때는 고즈넉이 의기양양해지고 기쁜 추억일 때는 소란스럽게 의기양양해진다. (서울 1964년 겨울, 260쪽)

물론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그전에도 항상 이건 내가 아니라고 생각하며 살았었다. 이건 내가 아니고 이전의 내가 나라고 한다면 이전의 나는 그 이전의 나를, 그 이전의 나는 그 그 이전의 나를.... 그리하여 나는 무(無)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건 내가 아니라고 하는 바로 내가 나임을 안다. (서울의 달빛 0장, 401쪽)

몇 가지 근사한 보편적인 문장들이 있어서 옮겨 적었다. 아, 왜 소설을 안 쓰시는 겁니까 김승옥 선생님! 그치만 하느님으로 이르는 길을 보다 잘 밝히기 위해서 소설을 다시 써볼까 싶다고 말씀하시는 걸 보면 그의 소설이 썩 기대되는 건 아니다. 60,70년대 그의 작품들은 확실히 천재적인 무언가가 있다. 걍 여기서 만족하자.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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