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의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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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우석훈 (개마고원,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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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어떤 이가 이십대이고, 여성이고, 지방에 살고 있는데, 거기에 고졸이고, 또 아주 약간 다리가 불편하다고 생각해봅시다. 자, 이 사람의 삶은 어떨 것이고, 임금은 어느 수준일지, 도대체 가늠이나 되십니까? 아니, 이 정도에서 경제활동을 할 수나 있을까요? '약한 고리'라고 할 수 있는 조건을 다섯 가지나 가진 이 사람에게 한국이란 나라는 과연 어떻게 느껴질까요? 아마도 지옥이 아닐까요? 여기다 무지막지한 조건 하나를 더 붙여볼까요? 그녀가 농민이라면? 물론 일반적인 통계와 가중치에서 이 여성은 엄청나게 불행할 것 같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은 것 같습니다. 이건 농업이라는 분야가 가지고 있는 특수성 때문에 그렇습니다. ... 그렇다면 현재 이런 이십대 여성의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굴까요? 아마도 남성이고, 서울에 살고, 기업으로 치면 민간업체의 부장이나 이사, 혹은 정부의 국장급 이상인 사람이겠지요. 그리고 대부분 소위 SKY 대학을 졸업했겠지요?... 이러한 두 개의 극단적인 축으로 2004년 이후의 한국이 형성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건 결코 무리가 아닙니다.

자, 같은 생각을 이제 공간을 바꾸어서 해보겠습니다. 학문적인 접근을 떠나서 아까 제가 제시했던 것과 같은 이십대 고졸로서 지방에 사는 여성의 경우, 뉴질랜드나 캐나다에 있으면 행복할 수 있고, 스웨덴에 있다면 정말 행복할 것이고, 만약 스위스에 있다면 아마 구청에서 지원하는 지역봉사단체나 사회적 기업 같은 곳에서 연봉 4000만원 이상의 임금을 받을 확률이 90%는 될 겁니다. 그리고 만약 본인이 정치적 야심이 있다면, 지방의원이 되기에 대단히 좋은 조건을 갖춘 셈이고, 사회지도자가 되고 싶다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차이가 '천국과 지옥' 같아 보이지 않나요? 제 눈에는 그렇게 보입니다. (182~183쪽)

지나치게 길다 싶은 발췌문으로 리뷰 첫머리를 가득 채우는 건 별로 성의없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한국 경제에 대한 아주 생생한 스케치라고 생각해서 굳이 무리수를 뒀다.

만약 이런 내용을 주위 친구나 친척들에게 설명해주면 그들은 "그래, 그렇게 되면 물론 좋겠는데, 우리 나라가 아직 선진국이 아니잖아"라거나 혹은 "한국 사람들이 원래 이기적이어서 우리 나라는 안 돼" , 크게 묶어서 두 가지 종류의 답변을 들을 것 같다. 만약 그런 말을 실제로 듣는다면, 마음이 착한 친구에게는 이 책을 고이 선물할 것이고 되도 않게 무식한 놈이라면 그의 얼굴에 이 책을 던져버리고 싶을 것이다.

'괴물의 탄생'은 우석훈씨의 한국경제대안시리즈 4부작의 마지막 책이다. '88만원 세대', '조직의 재발견'(그 이전 제목은 '샌드위치위기론은 허구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 그리고 '괴물의 탄생'. 책마다 지향하는 독자층이 다르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특히 10대들이 읽어줬으면 해서 무척 쉽게 쓰여졌고, '조직의 재발견'은 기업을 포함한 주요 조직의 간부들을 상상하면서 썼기 때문에 쉽다고 보기는 힘들고, '88만원 세대'와 '괴물의 탄생'은 대학교 문과계열 2~3학년 이상 정도 되면 거의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각각의 책이 한국 경제의 여러 약점들, 혹은 심각하게 걱정되는 부분들을 다루고 있다. '88만원 세대'는 현재 20대 초중반인 사람들의 미래는 5%를 향한 95%의 목숨 건 경쟁이다, 대충 그런 내용이다. '조직의 재발견'은 '조직경제학'이라는, 사회학과 심리학과 인류학에 가까운 관점으로 한국의 주요 조직들의 구조를 분석하고 외국의 것들과 비교하면서 '사장들 이윤 내고 싶은 거 나도 안다, 근데 현대 세계 경제에서 한국처럼 권위적이고 경쟁을 동력으로 삼는 조직들은 성공하기 힘들다'는 메세지를 사장들에게 전하고 싶어한다. '촌놈들의 제국주의'는 최근에 읽었는데 오죽했으면 10대들이 읽어주길 바랄까, 바로 '전쟁'에 관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의 메세지를 요약하면 '얘들아, 적어도 나 살아 생전만이라도 내 나라에서 전쟁은 안 보고 죽을 수 있게 해주라' 뭐 그 정도 되겠다.

 

그리고 '괴물의 탄생'. 머리말에서 '괴물'이라는 표현의 원형은 홉스의 '리바이이던'에서 빌려왔음을 밝히고 있다. 홉스의 '리바이어던'을 읽어봤거나(한국에 완역본이 안 나오긴 했지만) 조금 공부해본 사람이라면 이 비유가 어떤 뜻인지 대강 짐작할 수 있는데, 아주 적절하다.

홉스가 제시한 사회계약 이전의 인간을 고독한 늑대로 비유할 수 있겠다. 이 늑대들이 그렇게 살아보니 너무 피곤하고 힘든 거다. 그래서 자신들의 무력을 한 마리의 늑대에게 양도하는데, 그 늑대는 정작 무력을 포기하지 않는다. 즉 세상의 모든 늑대들이 양이 되고 대신 단 한 마리의 늑대는 양이 되지 않은 채로 살아가는 것이다. 바로 이 늑대가 홉스의 리바이어던이고 그가 생각하는 '국가'이다(내가 지어낸 거 아니다).

이 책의 제목에서의 '괴물'은 무력을 포기하지 않은 '단 한 마리의 늑대'와 무척 유사하다. 지금은 양이 된 예전의 늑대들이 자신들의 무력(혹은 권리)를 실제로 '괴물'(선거라는 절차를 통해, 이명박에게)에게 양도했다. 그래서 '괴물'에게는 거칠 것이 없는 것이다! 양이 되어버린 우리 모두가 그 괴물을 만들어낸 셈이다.

이 책의 구성은 앞의 책들과 좀 다르다. 여는글을 제외하면 모두 경어체이다. 대학 강의록 형식으로 쓰여져 흐름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1부는 '세계경제의 흐름과 경제이론의 변화', 즉 세계경제이론의 시작부터 자본주의가 가장 잘 날리던 18세기와 19세기 유럽의 경제학을 대략 소개한다. 2부는 '괴물의 탄생'인데, 한국 경제의 짧은 역사를 소개하면서 특히 2000년대 이후 아주 빠른 속도로 은밀하게 성장하여 마침내 승리한 '괴물'의 생애를 설명한다. 마지막 3부 '괴물의 해체'는, 앞의 시리즈 4권을 통틀어서, 이제 저자가 생각하는 한국 경제의 대안을 비로소 풀어놓는 부분이다. 대안이라고 해봤자 사실 별 거 없다. 저자 본인이 말한대로 지금 당장이라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정책적 대안과 몇 가지 루트들은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고, 의지만 있으면 실행할 수 있고, 또 실제로 상당 부분 현재 한국의 여러 문제들을 해소할 수 있다. 근데 그게 안 되고 있는 게 가장 심각한 문제 아닌가.

이 '가장 심각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내가 개인적으로 주목한 것은 '책'과 '예술'이고, 또 이 두가지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해결을 가능하게 해줄 길이라고 생각하는 편이다. 그래서 책을 읽기 시작했고, 책을 선물하고, 책 리뷰를 쓴다. 예술을 많이 접한 사람들은 대체로 편견이 없고, 감수성이 풍부해 타인의 처지에 쉽게 공감한다. 이런 사람과 한국 사회의 여러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벽이 떡 하고 가로막고 있는 참담함은 느끼지 않을 수 있다. 내 능력만 받쳐주면 충분히 쉽고 논리적으로 전달해줄 수 있다.

그렇지만 어쨌든 저자로서는 독자들을 위해 자신이 생각하는 '방법'을 대안으로 내놓았다. '제3부문'이라고 불리는 국민 경제의 한 영역이 성장해야 한다는게 요지이다. 유럽 선진국들을 살펴보면 그런 영역이 뚜렷이 존재함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한다. 국가와 시장으로 이분된 게 아니라(한국을 비롯한 중남미형 국가들은 여기에 '지하 경제'라는 무시무시한 영역으로 삼분되지만) 생활협동조합, 사회적 기업, 시민 단체 등의 영역이 국민경제 내에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다. 작게는 10%에서 많게는 30%까지 관찰된다고 한다. 내 생각에 바로 이 영역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전쟁보다는 평화로움에서 득을 볼 사람들이고 그 사회가 막장으로 가는 데에 제동을 걸어줄 수 있는 사람들일 것 같다. 즉 '괴물'의 탄생을 막아낼 사람들이다.

 

하여간 너무 좋은 책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읽어야만 하는 책이고 게다가 우리들의 삶에 관한 책인데, 좀 안 팔려서 저자도 속상하고 나도 속상하고 그렇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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