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중전과 문학

W. G. 제발트 지음 | 이경진 옮김 | 문학동네 | 2013년 

 

소설과 문학에 대해서는 쓰지 않고 싶었다. 더 잘 쓰는 이들이 많고 더 잘 읽는 이들이 많다. 나는 그저 인문 책을 만들고 소설을 취미로 읽는 편집자일 뿐이다. 지난 한 달간 읽은 책이 하나같이 소설이어서 이래도 되나 하는 직업적 경각심이 생기기도 했다. 
제발트는 1944년 독일에서 태어나 영국에서 반생을 보내고 2001년 교통사고로 사망한 작가이다. 대부분의 작품을 독일어로 썼으니 독일인 작가라고 보면 된다. 1992년에 소설 『이민자들』을 발표했고 수전 손택의 추천사와 함께 영국과 미국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 우리 시대에 이와 비슷한 책이 발표된 적은 있지만, 이 책의 숭고함을 따라올 수 없다.” 제발트는 회복 불가능한 상실을 당한 사람들, 돌이킬 수 없는 구멍을 안고 사는 사람들을 그린다. 2차 대전에 관한 많은 소설들과 달리 그는 전쟁의 풍경을 직접 그리지 않는다. 그는 ‘이후’의 삶을 기록한다.
『공중전과 문학』은 문학동네에서 무려 ‘W. G. 제발트 선집 01’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온 책이다. 제목은 독일어판 원서의 제목 'Luftkrieg und Literatur'을 그대로 옮겼다. 영어판에서는 다른 글들과 함께 'On the Natural History of Destruction'이라는 제목으로 묶여 나왔다.
이 책에는 1997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한 강연을 토대로 쓴 「공중전과 문학」, 독일 소설가 알프레트 안더쉬를 구실 삼아 전후 독일 문학을 비판한 「알프레트 안더쉬」가 실려 있다. 앞의 글 「공중전과 문학」은 어떤 비유적 의미 없이 ‘공중전’과 ‘문학’에 대해 말한다. “영국 공군이 독자적으로 40만 번의 출격으로 100만 톤의 폭탄을 적국 영토에 투하”했고 “공격받았던 총 131개의 독일 도시 가운데 몇몇 도시가 거의 철두철미하게 붕괴”되었으며 “독일 민간인 60만 명이 이 공중전으로 희생”된 사건. 그렇게 붕괴된 도시 가운데 미국인 포로 커트 보네거트가 살아남은 드레스덴이 있다. 보네거트는 이 기억을 『제5도살장』에서 정말로 훌륭하게 그렸다.
제발트는 수십만 명이 죽고 종전 무렵엔 750만 명이나 거리로 나앉았던 이 사건, 폭격과 공중전의 기억을 독일 사회에 환기했다. 그의 환기는 도발이었다. 제발트는 전후 독일 사회가 이 사건을 놀라울 만큼 감쪽같이 망각해버렸고, 전후 독일 문학이 거기에 일조했을 뿐만 아니라 수준 높은 무능함으로 거기에 적극적으로 동조했다고 비판한다. 그래서 그는 “왜 독일 작가들은 수백만 명이 경험한 독일 도시들의 파괴를 서술하려 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그러한 서술을 하는 데 왜 그렇게 무능했는가를 추적”(108쪽)한다. 
하지만 그 추적의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은 내게 너무나 아름다운 소설을 쓴 소설가의 문학론이다. 이것은 매우 논쟁적인 주제이다. 가령 이런 대목들이 그렇다. "파괴에서 형이상학적 의미를 구해내는 이들은 대개 그런 비참한 운명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다. 그들이 하는 작업은 정확한 기억보다 덜 위험하기 때문이다."(76쪽, 강조는 인용자) "노사크의 글에서 적어도 상당 부분은 진리의 이상이 전적으로 소박한 사실성에 입각해 결의되어 있으며, 이 진리의 이상은 완전한 파괴에 직면하여 문학 작업을 계속해야 하는 유일하게 정당한 근거로 입증되고 있다. 하지만 이와 정반대로, 초토화된 세계의 폐허로부터 미학적이거나 유사 미학적인 효과들을 만들어내는 것은 문학이 자기 정당성을 스스로 박탈하는 처사이다."(77쪽, 강조는 인용자) 그는 “형이상학적 의미”, “미학적이거나 유사 미학적인 효과” 같은 말로 전후 독일 문학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자신이 인정한 몇몇 소설가들의 작품을 “소박한 사실성”, “순수한 사실성”, “산문적 냉정성” 같은 말로 표현한다. 이 두 가지 대비를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하지만 너무도 자주, 너무도 갑작스럽게 압도하는 기억에서 나를 지켜내기 위해서는 오로지 글을 쓰는 길밖에 없었다는 것도 사실이다. 그 기억들이 내 머릿속에 갇혀 있었더라면,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무거워져 결국 나는 그 짐을 감당하지 못하고 쓰러지고 말았을 것이다. 기억들은 몇 달, 몇 년 동안 우리 마음 속에서 잠자면서 소리없이 점점 더 자라나다가, 결국 어떤 사소한 일을 계기로 되살아나 기묘한 방식으로 삶을 향한 우리의 눈을 멀게 한다. 그 때문에 나는 얼마나 자주 나의 기억들과 이 기억들을 글로 옮기는 작업을 굴욕적이고, 결국은 저주할 만한 일로 느끼곤 했던가! 하지만 기억이 없다면 우리는 무엇이 될까? 우리는 가장 단순한 생각조차 정리하지 못할 것이고, 풍부한 감정을 지닌 심장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애착을 느끼지 못할 것이며, 우리의 존재는 무의미한 순간들의 끝없는 연쇄에 불과할 것이고, 과거의 흔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게 될 것이다.(『토성의 고리』, 299쪽.)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뚫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 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 (『이민자들』, 240쪽.)

 

덧붙이는 말. 이 책 156쪽의 각주는 자칫 잘못된 내용일 수 있다. 1933년 독일 제국국회의사당 방화 사건은 각주에 적힌 대로 흔히 “나치스 정부가 반나치스 세력을 비난하는 여론을 조성하고 비상대권을 장악하기 위해 꾸민 자작극으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강조는 인용자), 독일 역사가 브로샤트에 따르면 네덜란드인 “판 데어 루베의 단독 범행이 더 이상 부인될 수 없는 사실”로 1969년에 이미 확립되었다고 한다.(『히틀러 국가, 114쪽.)

 

* <월간 이리> 9월 호. 

 

 


공중전과 문학

저자
W. G. 제발트 지음
출판사
문학동네 | 2013-06-20 출간
카테고리
인문
책소개
독일문학에게 전쟁의 책임을 묻다!「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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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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