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화점에 대한 찬가 : <백화점의 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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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방 선생님들과 갖는 인문학 스터디에서 읽은 책이다. 나처럼 어중이 떠중이 주워 들은 것은 많은 사람, 제대로 공부를 해 대학원에 간 불문과 석사 ㅊㅇㅎ(내게 "그냥 공부나 해"라고 말했던 바로 그), 지적 호기심과 때로는 격하기까지 한 고민을 풀어놓는 ㅈㄸ쌤, 한문학과 중어중문학이라는 환상의 전공-부전공 조합을 선택한 ㅇㅂ쌤, 알고 보니 굉장히 명민해 나로 하여금 인문학 혹은 문학을 부전공하라고 꼬시게끔 만드는 ㄷㅎ쌤(그는 카투사에 합격했다!), 뜻 모를 야성적인 웃음을 날려 주는 ㅎㅅ쌤, 나로서는 두 손을 들 수 밖에 없는 ㅇㅈ쌤(그녀는 시를 읽는다), 변화가 기대되는 ㅈㅇ쌤. 이렇게 7명과 나, 모두 8명이서 하는 스터디다. 스터디의 전체적인 목표는 '근대'.
무척 짧고 쉬운 책이다. 뿌리와이파리, 내가 좋아하는 인문학 출판사(엄밀히 말해 인문-교양 출판사라고 불러야 겠지만...)에서 나온 책이기도 하다.
부시코 부부의 일대기, 라고 봐도 무방하다. 아스트리드 부시코와 그의 아내 마르그리트 부시코의 업적은, 책을 읽으며,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였다. 알고 보니, 현대 '소비 자본주의'의 거의 모든 특성들을 최초로 발명해 낸 사람들이 바로 이 사람들이었다! 두 부부는, 자본주의의 영웅들이라 할 만하다. 나는 정말로 탄복했고 완전히 동의했다.
프랑스 밖의 세계적 상황을 포함한 분석인지는 모르겠으나 최초의 '백화점' 봉 마르셰를 만든 사람이 바로 부시코이다. 이 백화점이라는 것은 철저히 근대적인 존재였다. 일단 1860년대에 최초로 만들어 졌다. 또한 이전의 상점들과는 전적으로, 판이하게 다른 공간이었다.
오늘날의 백화점과 작은 열쇠 가게(전근대적, 수공업적, 그래서 '전통적'이라는 수식어를 연상케 하는)를 비교해서 도출되는 백화점의 모든 특징들은 부시코가 최초로 발명해낸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물론, 그가 이전의 토대 없이 백지 상태에서 출발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19세기 초반 프랑스 파리에서 유행한 어느 마가쟁 드 누보테의 젊은 점원으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마가쟁 드 누보테는 당시 소규모 상점들 사이에서 출현한 신종 상점이었다. 윈도우 디스플레이라든가, 이전에는 가게에 들어온 이상 물건을 사지 않고는 나갈 수가 없었던 관례를 깼고, 점원과 손님 사이의 위계를 역전시켰던 곳이 바로 '마가쟁 드 누보테'다. 부시코는 여기서 백화점의 근본적인 힌트를 얻었던 것 같다.
굳이 여기서 부시코의 업적을 일일이 거론하느니 200쪽 조금 넘는 책을 직접 읽어보시는 게 훨 낫다. 일단 눈에 띄는 대로 몇 몇 구절들을 발췌해 보았다.
부시코의 백화점 전략이란 한마디로 '경이'를 무기 삼아 소비자에게 불의의 타격을 가해 멍한 방심상태로 몰아넣는 것이었다. 26쪽
그는 제대로 였다! 그 이전의 누구도 그런 방식으로 소비자들을 유혹할 생각은 하지 못했다! 상품에 '경이'를 가지다니, 그 이성의 시대에!
박리다매 방식, 바겐세일, 테마별로 묶은 대매출, 미끼상품, 반품 가능이라는, 부시코가 봉 마르셰에서 만들어낸 판매방법은 전체가 하나의 커다란 원칙에 기초하고 있었다. 즉 많은 종류의 상품을 대량으로 판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원칙을 관철하려면 반드시 갖추어야 하는 조건이 있다. 그것은 다종의 상품을 대량으로 진열할 수 있는 공간, 즉 거대한 가게이다. 59쪽
이 때가 19세기 중반이었음을 주목하라. 나폴레옹 3세의 집권, 파리 시장 오스망의 파리 개조 작전이 이제 막 시작된 때였다. 파리를 통틀어, 아니 전 유럽을 통틀어 '대성당'과 '공장'을 제외하고는 이 정도로 압도적인 거대한 '건물'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더구나 성당은 세속을 벗어난 종교의 공간이었다. 파리 한복판에 세속이 만들어낸 최초의 거대한 건물이 들어선 것이다.)
즉, 부시코는 단순히 미끼 상품이나 바겐세일이라는 상품의 힘으로 소비자의 발길을 잡아끄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새로운 봉 마르셰라는 건물 그 자체의 매력, 백화점이라는 이미지의 힘으로 소비자를 유혹하려고 생각했던 것이다. 61쪽
그런데 손님의 흐름을 한 곳에 고정시키지 않고 인파가 늘 가게 안을 돌아다니도록 하려는 부시코의 이런 발상은 실은 상품과 돈을 맹렬한 속도로 회전시켜 경영규모를 무한으로 확대해간다는 그의 독특한 상업철학의 기본 테마와 분명하게 이어져 있다. 한마디로 말해 상품과 돈과 인간이라는 삼위일체의 혈액이 끊임없이 체내를 '순환'(미셸 세르의 졸라론 <불, 그리고 안개 속의 신호 - 졸라>의 핵심개념)하게 만듦으로써 백화점이라는 인체는 생명의 불을 계속해서 피울 수 있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봉 마르셰의 건축도면은 정면도도 단면도도 정말로 인체해부도, 특히 혈관의 순환도와 닮아 있지 않은가? 75쪽
즉, 사치스러운 물건이 발하는 아우라를 최대한으로 이용해 여성의 피학 욕망을 구매욕망으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제2의 유혹이다. 88쪽
여기서의 '아우라'는 거짓말이 아니다. 책 곳곳에 실린 봉 마르셰의 그림들과 자주 인용되는 졸라의 소설 <보뇌르 데 담 백화점에서>(실제로 졸라는 '봉 마르셰'를 모델로 삼아 소설을 썼다)의 구절들은, 실제로 봉 마르셰의 비단들과 흰 옷들이 '아우라'를 내뿜었음을 보여준다.
한마디로 말해, 봉 마르셰는 당위로서 라이프스타일을 설정해줌으로써 신흥 중산계급이, 특히 이 계급의 여성이 갖고 있던 사치에 대한 죄의식을 없애버리는 데에 성공했다. 설령 사치스러운 상품을 사고 말았더라도 그것은 계급의 의무를 다하는 것이므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다. 97쪽
부시코가 마치 오페라와도 같이 진열한 백화점의 상품들은 박리다매라는 시스템의 힘으로 가능해진 믿을 수 없을 만큼 싼값에 의해, 그리고 자신도 모르게 갖고 싶어지게 되는 그 사치욕망에 의해, 결합술이 빚어내는 디스플레이의 아름다움에 의해, 생전 본 적도 없는 물건들이 한 곳에 모여 있다는 신기함에 의해, 혹은 그것이 그저 그곳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요컨대 상품 스스로가 발하는 아우라에 의해, 물건을 사러 온 손님의 잠재적인 구매욕망을 일깨워 필요하지도 않은 물건까지 사게 만드는 독특한 마력을 발휘했다. 벤야민이 말한 '사용가치에서 교환가치로'의 전환이 이루어진 것은 바로 이 백화점이라는 공간이 최초였다. 212~213쪽
게다가, 이 부부는 봉 마르셰를 (아마도 근대 최초의, 아니 아마도 인류 역사상 최초의) 종업원지주회사로 만들었다. 시골 출신의 옷가게 점원들을 존경받는 (아마도 근대 최초의) 화이트 칼라로 재탄생한 것도 그들의 업적이었다. 백화점 내부에 도서를 진열한 문화 공간을 만들어낸 것도, 파리의 여느 화장실과도 비교할 수 없는 위생적인 화장실을 만든 것도, 유럽 전역에 통신 판매를 실시해 어마어마한 수익을 창출한 것도, 퇴직금 제도를 만들어 종업원 뿐만 아니라 파리 시민의 존경을 단번에 얻은 것도, 종업원들에게 교양강좌를 실시하고 종업원 오케스트라를 만들어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음악회를 연 것도, 무료 사원식당을 만든 것도, 마치 오늘날 경제신문이 그렇듯 기사를 가장해 기업을 광고하는 방식을 개발한 것도... 모두 부시코 부부의 업적이었고, 그들의 업적은 거의 모든 것이 '최초'였다. 이러니 그들을 두고 '영웅'이라고 부르지 않을 수가 없다.
"백화점의 소비자들의 욕망을 이끌어내기 위한 여러 전략 중 종업원을 남성으로 하는 것의 사회적 의미는 그 중에서도 매우 특징적이다. 이는 백화점의 주요 고객층인 여성들이 봤을 때 충격적인 장면이었다. 이전까지만 해도 종업원이라는 낮은 위치의 직업은 여성들의 차지였는데, 종업원이 남성이라는 것, 즉, 여성이 남성보다 높은 위치를 점유한다는 것은 엄청나게 드문 일이었다.(아니 실은 최초가 아니었을까!) 이러한 일은 여성들에게 묘한 성취감을 유발시켰다. 또한, 잘생긴 남성 종업원이 웃음지으며 여성에게 말을 건낼 때 여성들은 일종의 성적 쾌감을 느꼈을 것이다. 이렇게 기존 사회에 억눌린 여성들의 욕망이 쇼핑으로 충족된다는 것에 여성 소비자가 매료된 것이다. 지배의 도취감이나 성적 쾌감 같이 본능적이고 직접적인 욕망을 판매에 이용하였던 부시코의 치밀함이 대단하면서도 소름끼친다." 한 선생님이 스터디를 정리한 내용 중 일부를 발췌해 조금 다듬었다. 스터디 자리에서 나 역시 이 부분을 두고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떠들었다.
자본주의의 근본적인 악마성을 떠나, 소비자본주의의 간악함과 교묘함에 대한 도덕적 비난을 떠나, 나는 진심으로 정말 그들의 업적이 놀라웠다. 나는 그들의 업적에, 현실화해낸 공간 및 업적들의 거대함과 화려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들의 위대한 발명들은 모두 하나의 근본적인 동기로부터 출발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 '이윤'의 창출. 다만 맑스 역시 <공산당 선언>에서 그러했듯, 인정할 건 인정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부르주아지는 이전의 모든 변화를 합친 것보다 크고 거대한 변화를 이룩했다는 사실.
백화점에서 시선을 돌려 보면 다음과 같은 점을 깨달을 수 있다. 부시코 부부가 만든 백화점으로 인해 문을 닫아야 했던 파리의 마가쟁 드 누보테들과 소규모 상점들은 오늘날 마트가 들어서며 사라져 가는 지역 상권들과 다를 바 없다. 또한, 봉 마르셰의 박리다매는 지방 생산자들의 이윤 저하 -> 노동 생산성 증대에 대한 압박 으로 이어졌고 이는 곧 노동자들의 임금 저하, 노동 강도 강화로 귀결되었을 것이다. 그 밖에도 여러 가지를 발견할 수 있겠지만 힘에 버거우니, 무책임하게도 리뷰는 여기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