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논픽션

알랭 드 보통 산문집, 공항에서 일주일을

권고마 2010. 8. 28. 16:17

시민들이 선물해준 책. 매 분기마다 베스트셀러 목록을 확인할 수 있게 된다. <삼성을 생각한다> 같은 책들은 아무리 많이 팔려도 만나기 힘들겠지만. 버틀런드 러셀의 <행복의 정복>도 읽고 있는 중이다. 기욤 뮈소,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은 대부분 만날 수 있다. 이참에 조금씩 읽어나갈 생각이다. 대체 왜들 그렇게 좋아하는지, 읽어대는지, 궁금하니까.
러셀의 책을 열심히 재밌게 읽고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무실에 앉아 책만 펴들면 졸려서 꾸벅, 꾸벅. 이대로는 안 된다 싶었고 캐비넷 위에 쌓여 있는 책 박스 중 하나를 내려 뒤졌다. 이 책이 눈에 띄었고, 공항에 대한 이야기 였으며, 보통 보통 그러는데 대체 뭐가 보통인가 하는 호기심도 오래 전부터 가지고 있었으므로 꺼내 들었다.
히드로 공항, 거대한 터미널 5. 유럽 곳곳의 공항을 소유한 다국적기업의 최고경영자가 허락한 기획. 잘 나가는 에세이 작가를 불러 이곳에 일주일 동안 상주하게 하자, 그가 무엇을 쓰든 검열하지 않겠다! 궁극의 자신만만함. 그래서 이 머리 벗겨진 아저씨는 터미널 가운데에 책상을 놓고 사진 작가와 함께 이리저리 쏘다닌다. 글과 사진이 함께 있어 다행스러운 책. 글 만으로는 좀 심심했을 듯. 공항에 가본 적은 단 한 번, 유럽 땅에 발 디딘 적은 아예 없는 내게 영국의 거대한 터미널 풍경에 대한 묘사가 쉽게 와닿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아, 이 책의 번역자는 공교롭게도, 정영목씨! 나의 음모론은 점점 더 짙어지고 있다.

우리는 기꺼이 동정심을 바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실제로는 그녀가 그런 슬픔을 느낄 만한 강력한 동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축하하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우리는 그녀가 함께 있지 못하면 - 리우 교외의 텅 빈 학생용 침실은 물론이고 바로 눈앞의 게이트 너머에서도 - 꼭 죽고 말 것 같은 사람을 찾아냈다는 점이 부러웠을 것이다. 만일 그녀가 충분한 거리를 두고 자신의 상황을 볼 수 있었다면, 지금이 자신의 인생에서 정점으로 꼽을 만한 시간임을 인식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는 이따금씩 특이하게 왼쪽 다리를 떠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61~63쪽, 65쪽 (굵은 글씨는 발췌자, 아래 마찬가지)

대합실의 분위기는 쓸쓸하다. 그러나 묘하게도 그 느낌은 자비롭다. 전체적인 분위기가 그렇기 때문에 혼자만 외로울 경우에 겪을 수도 있는 불편이 없고, 그래서 역설적으로, 혼잡한 도시의 술집이 분명히 더 쾌활하기는 하겠지만, 그런 환경에서는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방식으로 새로운 만남을 시도하는 것이 가능해 보이기 때문이다. 밤이면 공항은 유목민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들의 본거지가 된다. 157쪽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이 일을 하느라 바빠서 나오지 못할 것이라고 분명히 말했다고 해도, 우리가 애초에 여행을 떠난 것에 불만이 있어 보기도 싫다는 말을 했다고 해도, 지난 6월에 우리 곁을 떠났거나 12년 반 전에 죽었다고 해도, 그래도 그들이 나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그냥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고 우리가 특별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주려고(우리가 작은 아이였을 때 누군가 가끔이라도 그렇게 해주었을 것이며, 그런 일이 없었다면 우리는 절대 여기까지 올 힘을 낼 수 없었을 것이다) 나와주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에 몸을 떨지 않을 수가 없다. 따라서 우리는 도착 라운지로 나아가면서 얼굴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186쪽

부담없이 이틀동안 다 읽었다. 여러 장면들 중에서 역시나 심금을 울리는 것은 헤어짐과 재회. 첫 발췌문은 헤어지는 연인의 모습을 담은 사진에 이은 글이고, 세번째 발췌문은 게이트를 나서며 재회하는 사람들에 관한 글이다. 첫번째 발췌문과 관련된 장면이 아주 흥미로웠다. 작가와 사진가는 헤어진 두 연인의 이후를 추적한다. 작가는 여자를, 사진가는 남자를. 헤어짐의 첫 발걸음은 여자가 먼저 뗐다. 작가는 그 모습을 두고 세이렌의 유혹을 힘껏 물리치는 오디세우스 같은 느낌이라고 했다. 단호하게 걸음을 옮기던 그녀는 어느 상점 앞에서 무너진다. 사진가는 특급행 열차에 올라탄 남자를 따라 갔다. 열차 안 의자에 앉은 남자의 모습. "그는 이따금씩 특이하게 왼쪽 다리를 떠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감정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 남자의 눈빛과 표정이 그려졌다. 묘사가 기묘하게 마음을 흔들었다.
편안한 문장. 가끔씩 등장하는, 튀지 않게 빛나는 통찰들. 한편 이런 종류의 책은 한국에서 지금껏 보지 못했고, 앞으로도 보기 힘들겠다 싶었다. 일단 르뽀문학 자체가 드문 곳이다. 광화문 사거리 라든가, 전국 각지의 교보문고, 여러 도시들의 영화관 앞, 그런 곳에서 작가들이 며칠동안 머무르며 이런 글을 써보면 재밌을 텐데. 며칠 뿐이므로 날카로운 통찰 같은 건 기대하지 않는다. 과도하게 현란한 수사는 오히려 거짓말일 가능성이 짙다. 보이는 만큼만 쓰면 된다. 이 책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