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이경 지음, 순례자의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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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연히 헌책방에서 발견한 책. 김이경, 이라는 이름과 뿌리와이파리, 라는 출판사를 알고 있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 스윽 훑어 보니 '책'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모음집. 얼마 전 읽은 <책 사용법>이라는 책과 함께 샀었다.
저자의 이력이 인상적이어서 기억하고 있었다. 어느 서점에서 책을 뒤적이다 <마녀의 독서처방>라는 책을 발견했었다. 좀 유치한 제목이라고 생각하며 원저작(독서의 대상이 되는 책)들을 살펴 보았다. 첫인상과는 다르게 좋아하는 책들이 여럿 실려 있었다. 읽은 책도 1/4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재밌게 읽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치만 포기했다. 한 권을 읽는 대신 열 권을 읽고 싶어지게 될까봐.(난 돈도 시간도 부족하니까, 누군들 그렇지 않겠냐만) 이래서 서평집을 못 읽겠다.
모두 10개의 짧은 이야기 모음집이다. 가장 짧은 건 10쪽 남짓이다. 보기 드문 형식의 책이다. 한두편 읽을 땐 책과 관련한 재밌는 소재들을 다룬 이야기책이라고 짐작했다. 그 소재들이 하나하나 흥미롭고 책을 좋아하는 이들에겐 특히 그렇다. 조선 시대 소설 이야기, 분서의 역사, 제본과 인피 장정 등등. 저자는 대학원까지 다니며 역사를 공부했지만 시간강사 생활을 포기한 뒤 수년 동안 아르바이트를 하며 서대문 도서관에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시간, 공간, 죽음, 여성 같은 주제를 붙들고. 그런 독서의 이력이 있기에 이런 책을 쓸 수 있었겠다고 생각했다.(여담이지만, 독서가들에겐 자기만의 독특한 독서 이력이 있을 것 같다. 책을 고르는 방식 혹은 책을 접하게 되는 방식에 따라 결정적으로 달라지는. 그 이력이 그 독서가만의 독특한 색깔을 만들어내지 않을까. 독서가들도 스스로 개성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놀라운 발견! 우리는 읽기만 하는 게 아니다!)
그런데 풍부한 상상력을 가진 애서가의 흥미로운 이야기 모음집 수준이었던 책은 점점 더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여준다. 이야기를 풀어내는 솜씨가 훌륭하기도 했고('살아있는 도서관'), 독특한 소재가 아주 인상적이기도 했다. '책의 적을 찾아서'라는 작품은 가상 다큐멘터리인데 아주 즐거웠다. 진정한 책의 적은 히틀러도, 진시황도, 알렉산드리아의 테오필로스도, 세르비아의 카라지치도 아니었다.
하지만 오늘 재판을 지켜보면서, 책 혹은 지식이 미워하는 건 무지가 아니라 또 다른 지식이란 생각이 떠나질 않았습니다. ... 누가 (책의) 최악의 적으로 선정될지는 몰라도, 분명한 건 그자 역시 한 명의 독자라는 사실입니다. 자신의 책을 위해 헌신한 열혈독자였죠. 그러니까 비극은 바로 거기서 시작된 거 같아요. 책을 읽는다는 것, 제 생각엔 아무래도 그게 문제인 듯싶습니다. 252쪽
책을 읽는다는 건 자랑할 일도 부끄러워할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책임은 반드시 느껴야 하는 일이죠. 이런 생각 때문인지 요즘은 전처럼 책을 많이 읽지는 않습니다. 254쪽
진정 '독서가'라 할만한 저자는 이런 결론을 내비친다. 나 역시 공감할 수 있었다. 책이 만능은 아니다. 다만 게임, 운동, 다른 어떤 것과도 다른 즐거운 세계를 펼쳐내 보여준다는 점은 확실하다. 개인적으로는 책이 만들어내는 지도를 따라가며 지식에 대한 욕망이 커져가는 걸 느낀다. 더 많은 걸 알고 싶다는 욕망. 알아서 무엇을 어찌 하겠다는 게 아니라, 그냥 알고 싶다는 욕망 말이다. 뇌과학, 심리학, 역사와 철학, 종교, 신화, 자연과학 일반... 다른 어떤 단어로 포장할 수 없다. 말 그대로 '욕망'이다. 문학은 그 욕망의 촉매가 되어주기도 하고, 장애물이며, 적절한 견제자이다.
마지막 작품 '순례자의 책'은 감동을 주는 작품이다. 여느 소설집의 단편들보다 훨씬 크고 깊은 감동을 주는 작품. 30쪽도 안 되는 짧은 이야기인데도.
작지만 사랑스러운 책이다. 저자의 이력은 개인적으로 아주 인상적이고, 감동적이기까지 하다.(저자 블로그 : 마녀의 숨은 책방) 책은 좋은 벗이지만 위험한 존재이기도 하다. 이 애증의 사물은 나를 더욱 설레도록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