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
권고마
2010. 11. 20. 15:04
절반 쯤 읽은 뒤 그만 읽고 싶었다. 더 읽기 귀찮았다. 사실, 중반부 이후로 소설의 결말은 뻔해 보였다. '아마도 일이 그렇게 잘 풀리진 않을 것이다.' 등장인물들의 삶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는데 굳이 끝까지 다 읽어야 하나, 고민했다.
별로 놀랍지 않았다. 등장인물들의 모습도 어색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잘 모른다. 그들이 밖이 아니라 '안'에 있는 평일 대낮이라는 시간, 시청 앞과 정부종합청사 앞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그곳에선 하루를 거르지 않고 고발과 규탄이 이어지고, 몇 오지도 않는 기자들을 초대하기 위해 수십 명에게 구구절절한 호소문을 발송한다. 가서 보면 당혹감에 휩싸일 것이다. 이 현실이 나의 어제 오늘과 같은 현실인가, 하고.
문득 의심이 들었다. 어쩌면 나는 귀찮은 게 아니라 불편한 걸지도 모른다. 외면하고 싶은 걸지도 모른다. 그리고 만약 불편함이 더이상 거리에 서지 않은 뒤로 갖게 된 부채감과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라면, 외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빠른 속도로 읽어 나갔다. 휙휙 넘어가는 쪽수가 찝찝하지 않았다. 내게도 같은 종류의 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강인호가 지고 있는 짐은 나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거울 것이다. 그러나 무게의 양이 다르다 뿐이고, 그 양적 차이까진 문학으로선 극복 불가능하다.
개인적인 불편함과 별개로 소설을 다 읽고 나자 질문이 하나 생겼다. 그리고 화도 조금 났다. 먼저 이 소설을 쓰게 된 계기를 소개하는 구절부터 살펴보자. "이 소설을 처음 구상하게 된 것은 어떤 신문기사 한 줄 때문이었다. 그것은 선고공판이 있던 날의 법정 풍경을 그린 젊은 인턴기자의 스케치기사였다. 그 마지막 구절은 아마도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였던 것 같다."(작가의말) 저자는 위 기사를 쓴 기자들을 직접 만났고 사건의 피해자들, 그리고 그들을 돕는 이들과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눈 듯 했다.
나의 질문은 한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다. 왜 소설로 썼을까? 취재기(르포르타쥬)로 쓸 수 없는 사정이 있었을까? 가령, 가해자들을 만나는 게 사실상 불가능했다, 시간이 너무 오래 지났다, 와 같은. 이어지는 반론. 불가능한대로 쓰면 되지 않나? 사실이 그 자체로 말하는 바가 있다. 화가 났다. 독자들이 소설의 모든 내용을 사실이라고 믿어주길 바라는 건 작가의 오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가는 무슨 근거로 그런 바람을 가졌을까. 내가 공지영이다, '작가의 말'을 읽어 보라, 이 소설은 소설 같지 않은 소설이다! 이야기로 엮어 꾸미는 데에 어색한 부분, 사실 관계가 명확하지 않은 부분,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어 확정할 수 없는 부분, 그 모든 부분들을 작가가 '꾸며 냈다'고 믿지 않아야 할 이유가 있을까?
아니면. 작가는 사실을 말하려던 게 아니었을까. 소설가로서 솜씨를 십분 발휘하여 독자의 마음에 기승전결의 파문이 일기를 바랐던 걸까. 이 글이 소설인 이상 사실이라고 믿어야 할 이유는 없다. 믿던 말던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작가는 간교하게도, 이 소설을 읽는 양심있는 독자들이라면 이 이야기가 거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아니,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진행되고 나니 이 문제가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이건 소설에 대한 의미있는 의심일 수도 있다. 소설이라는 문학 형식은 '있을 법한', 그러나 실제로 있지 않은 이야기가 허용되는 글쓰기다.
눈에 힘이 들어가게 만들고, 눈알이 쓰리도록 만드는 솜씨는 훌륭하다. 그래, 우리는 모르는 게 너무 많고, 너무 많은 고통에 무관심하다. 이런 소설이 많이 읽혔다는 건 그만큼 좋은 일이다. 어쨌든 정말로 모르는 사람들도 많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