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황정은 장편소설, 백의 그림자

권고마 2010. 12. 12. 15:17
백의그림자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황정은 (민음사, 2010년)
상세보기

 

조금 난폭하게 말하자면, 누구의 배도 빌리지 않고 어느 날 숲에서 솟아나 공산품이라고는 일절 사용하지 않고 알몸으로 사는 경우가 아니고서야, 자신은 아무래도 빚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은 뻔뻔한 거라고 나는 생각해요.
공산품이 나쁜가요?
그런 이야기가 아니고요, 공산품이란 각종의 물질과 화학약품을 사용해서 대량으로 만들어 내는 것이라 여러 가지 사정이 생길 수 있잖아요? 강이 더러워진다든지, 대금이 너무 저렴하게 지불되는 노동력이라든지. 하다못해 양말 한 켤레를 싸게 사도, 그 값싼 물건에 대한 빚이 어딘가에서 발생한다는 이야기예요. 17~18쪽

그만둘까요.
어째서요.
이런 밤에 이런 이야기는 너무 얄궂어서요. ... 아버지는 죽어서 빚을 남기고 소년은 빚을 갚으며 어른이 되어 간다는 이야기이므로. 빚을 갚기 위해 빚을 지고, 빚의 이자를 갚기 위해 또 다른 빚을 지고, 전심전력으로, 그 틈에 점점 불어나는 먹고 사는 비용의 빚을 져 가는 일의 연속. 93쪽

이를테면 뒷집에 홀로 사는 할머니가 종이 박스를 줍는 일로 먹고산다는 것은 애초부터 자연스러운 일일까, 하고. ...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144쪽

정말이지. 발췌한 문장들을 찬찬히 읽으니 나라는 인간이 빤히 보인다. 하나같이 직접적이고, 사회비판적이다. 이 책은, 이 문장들처럼 대놓고 나무라고 적나라하게 서글픈 소설은 아니다. 오히려 저 문장들을 굳이 쓰지 않았더라도 작품으로선 부족하지 않다. 여러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작가는 어느 대목에선가 ‘이렇게 말해야 한다’(‘말할 수밖에 없다’ 보다는)고 생각했을 것이다. 근데 나는 딱 그런 대목들만 표시해 놓았다. 근본은 속일 수 없나.
허름한 도서관 구석에 꽂혀 있던 책. 남들이 그랬던 것처럼 나 역시 그냥 지나치고 말았을 것이다. 책 뒤표지의 ‘신형철’이란 이름을 발견하지 않았다면. 그 장소가 서점이었고, 책을 읽기 위해 사야만 하는 상황이었더라도 나는 이 책을 샀을 것이다. 그만큼 나는 ‘신형철’이라는 문학 평론가를 신뢰한다.
작품을 다 읽으니 참 좋았는데, 작품만큼이나 읽고 싶었던 신형철의 해설까지 읽고 나니, 머릿속에 남은 것은 해설이 알려준 해석들뿐인 것 같다. 그렇지만 은교씨와 무재씨, 두 남녀의 마지막 모습은 아주 생생하다. 무재라는 인물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느낌인 반면 여주인공 은교씨는 무척 자연스럽고 어색하지 않은 인물이다. 얼핏 보면 먼저 손을 내미는 무재씨가 더 건강하고, 강한 사람인 듯하다. 그런데 그게 아니다. 무재씨야말로 훨씬 더 위태로워 보이는 사람. 늦은 밤, 차가 고장났을 때, 무재씨의 그림자는 금방이라도 벌떡 일어날 것 같았다. 그에게 ‘빚’이라는 게 있어서일까. 나는 은교씨가 무재씨를 구해낸 것처럼 느껴진다.
작가가 용산참사 현장을 둘러보고 쓴 글이 실려 있다는 문학동네 2009년 겨울호. 꼭 구해서 읽어볼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