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잭 케루악 장편소설, 길 위에서

권고마 2011. 1. 25. 22:48
길위에서.1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문학선
지은이 잭 케루악 (민음사,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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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26. 일단 책 전체에 걸쳐 가장 인상 깊었던 점. '따뜻하다'를 '따듯하다'로 써놓았다. 한두 곳이면 오타구나 하고 넘어갈 텐데 일.이 권을 합쳐 500쪽 가까이 일관되게 그렇다. 고급종이 쓰면 뭐하나? 이런 실수는 전집 전체를 싸 보이게 만든다. 냉정한 평가와 별도로 귀엽기도 했다.(2013.5.31. '따듯하다'는 국어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단어입니다. 이 포스트를 쓰고 나서 한 이웃이 알려주셨어요.) 따듯하다, 따듯하다, 따듯하다. 더 편한 발음이구나. 바르게 발음하는 사람이 별로 없구나, 그런 생각도 들었고.
친구에게 빌린 책이다. 김연수씨가 어딘가에서 추천한 소설이라 샀다고 한다. 1950년대에 시작되어 1960년대 히피 운동으로 이어진 미국의 '비트(beat) 세대'를 흥미롭게 반영한 소설이라고도 한다. 정신없는 소설이다.
미국을 동에서 서로 두세 번 왕복하다가 마지막엔 위에서 아래로 멕시코시티까지 횡단하는 길 위의 여행이 커다란 줄거리다. 작가 스스로를 모델로 삼은 샐 파라다이스가 주인공이고 작가의 친구이기도 한 실존인물 닐 캐시디의 이름은 '딘 모리아티'다. 소설 속 등장인물 대부분 케루악과 캐시디의 실제 친구들을 모델로 삼았다.

"앞좌석에 있는 게 어떤 놈들인지 알아? 걱정하기를 엄청 좋아하는 사람들이야. 거리를 계산하고, 오늘 밤은 어디서 잘지 고민하고, 기름값이랑 날씨, 목적지까지 어떻게 갈지를 생각하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아도 어차피 도착할 건데 말이야. 정말 고민하고 싶어 안달이 난 놈들이야. (...) 만인이 인정하는 고민거리를 발견할 때까지 절대 편해지지 못해. 그리고 찾아내면 그다음에는 또 그에 맞춘 표정을 지어 보이지. 불안하다는 얼굴 말이야. 그런데 또 그게 계속 붙어 다니니까, 알고 있으면서 또 그것 때문에 고민하게 되는 거야. (...) '잘 모르겠지만, 저 주유소에서는 기름을 넣치 않는 게 좋겠어요, 최근에 <전국 페트로피우스 휘발유 뉴스>를 읽었는데, 이런 종류의 기름에는 옥탄 점액이 아주 많이 들어 있대요. 언젠가 누가 말해 줬는데, 반쯤 공인된 고주파 거시기까지 들어 있대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나는 지금 그럴 기분이 아니라서......' 어때, 무슨 뜻인지 알겠지?"(3부, 54~55쪽)

작품 자체에서 특별히 감동받진 않았다. 거의 미친 게 틀림없는 딘 모리아티의 앞뒤 맞지 않는 말과 과잉된 행동에 자주 놀랐다. 비트 세대란 이름으로 불렸던 당시 미국 젊은이들의 실제 모습이 궁금해졌다. 몇 년 전 68혁명에 대한 책을 두어 권 읽은 적이 있는데 새삼 신기하다. 미친 걸로만 따지면 더해 보이는 미국의 68세대는 정작 이뤄낸 게 거의 없는데, 유럽 애들에겐 무엇이 있었기에 세상을 바꿀 수 있었을까? 타지에서 전쟁을 경험한 미국 애들, 고향에서 전쟁을 겪어야 했던 유럽 애들. 소설 속 주인공 샐 파라다이스가 여행을 떠나게 된 계기는 참전의 경험과 관계가 있었던 게 분명하다. 작가도 해군에 입대하여 2차 대전을 경험했었다.
여기저기서 감동적인 장면을 발견했고, 모조리 옮겨 놓을까 하다가 힘겹게 골라냈다. 별 거 아니지만 마음 짠한 문장도 더러 있었다. 예컨대 이런 문장. "그녀는 내가 뭘 하든 다 좋아했다."(1부, 149쪽) 테리, 라는 145센티미터의 키 작은 멕시코 여인의 모습이 생생하게 느껴졌다. 골반이 너무 작아 제왕절개 수술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었다는 그녀. 그녀와 보내는 시간동안 샐은 드물게 행복해 한다. 이런 말도 한다. "나는 어두운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내가 사랑하는 이 작은 사람들에게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기도했다. 하지만 저 위의 그 누구도 내게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은 없었다. 그걸 일찌감치 깨달았어야 했는데."(1부, 158쪽) 그리고 나도 내 친구들에 대해 이런 식으로 쓸 수 있게 되고 싶다. "메이저는 붉은 얼굴에 성마르고 모든 것을 증오하는 땅딸막한 사내였지만, 좋은 일이 있었던 날 밤에는 세상에서 가장 따듯하고 매력적인 미소를 지을 수 있는 사람이었다."(1부, 69쪽)
아래는 길어 옮길까 말까 한동안 고민한 장면이다. 샐이 던지는 질문들, 샐이 요약한 그녀의 대답, 그리고 '이미 놓쳐 버렸다.' 그녀를 유혹하는 데 실패했다는 뜻으로 읽을 수도 있겠지만 처음이나 지금이나 나는 다르게 읽는다. 그녀는 자기 인생의 결정적인 순간 하나를 놓쳐버린 것이다. 스스로가 혁명적으로 변할 수 있는 순간. 그러므로 새로운 인식, 새로운 세계로 접어들 수 있는 문을.

나를 보는 커다란 검은 눈동자에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어도 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집안 대대로 물려받은 허무함과 후회 같은 것이 떠올랐다. 그게 무엇이든지 간에, 그런 것은 있게 마련이라고 모두들 알고 있다. "인생에서 원하는 게 뭐야?" 그녀를 붙들고 대답을 얻고 싶었다. 무엇을 원하는지, 그녀는 아무 생각도 없었다. 일, 영화, 여름에 할머니 집에 간 것, 뉴욕의 록시 극장에 가고 싶다는 것, 어떤 옷을 입고 갈지 - 지난 부활절에 입은 게 좋을지 같은 것, 하얀 보닛에 장미를 달고, 장밋빛 펌프스와 라벤더 색 개버딘 코트에 대해 말했다. "일요일 오후에는 뭐 해?" 내가 물었다. 현관에 앉아 있다고. 남자아이들이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다 잡담을 한다고 했다. 신문 일요일판 만화를 읽고, 해먹에 누워 있는다고. "더운 여름밤에는 뭐 해?" 현관에 앉아 있고, 차가 지나가는 것을 보고, 엄마와 함께 팝콘을 만든다고 했다. "아버지는 여름밤에 뭐 해?" 일하러 간다, 보일러 공장에서 밤새워 일한다고 했다. 평생 동안 한 여자와 그 여자가 이 세상에 내놓은 사람들을 먹여 살렸다. 감사나 존경도 받지 않고서. "남동생은 여름밤에 뭐 해?"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고 음료수 판매점 앞에 죽치고 있다고 했다. "그 애가 꼭 하고 싶어 하는 게 뭘까? 우리가 원하는 것 말이야." 모르겠다며 그녀는 하품을 했다. 졸린 듯했다. 대답 못 해. 아무도 모를 거야. 앞으로도 모를 거야. 이걸로 끝. 그녀는 열여덟 살이고 몹시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놓쳐 버렸다. (3부, 104~105쪽)

마지막으로 기묘하게 오늘날 우리 현실을 생각나게 하는 구절 하나를 덧붙인다.

흙둑 위에 앉아서 미시시피 강을 감상하고 싶었지만, 그 대신 철조망에 코를 대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람들을 강으로부터 격리시켜서 얻는 게 뭐지? "관료주의지!" 올드 불이 외쳤다. (2부, 24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