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토니오 스카르메타 소설, 네루다의 우편 배달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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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분이 자기의 '2008년의 책'으로 이 책을 꼽으셨다. 마침 헬보이 1권을 사려고 마음먹고 있을 때 이 책이 갑자기 생각났고 두 권을 같이 주문했다.
얼마 안 되는 짧은 책이다. 책이 집에 도착했을 당시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다가 힘에 부쳐서 진도를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스인 조르바'가 뭐 음울하고 어둡고 슬픈 내용의 책은 아니지만 이상하게 손을 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책들은 읽을 수 있겠는데, 유독 그랬다. 소설을 읽고는 싶은데 읽는 중인 '그리스인 조르바'는 못 읽겠고 좀 더 짧고 밝은 문체의 책을 읽어야겠다 싶어서 이 책을 펴들었다.
이틀 만에 다 읽었는데 정말 아름다운 소설이다. 이슬라 네그라의 풍경과 바다를 쉼없이 상상하게 만들었다. '시'를 잘 읽지 못하고 감동을 쉬이 느끼지 못하는 내게 '메타포'를, '운율'을, 그 어느 선생의 말보다 그 어느 책의 설명보다 알기 쉽게 가르쳐줬다.
네루다는 만족하여 시를 멈췄다.
"어때?"
"이상해요."
'이상해요'라니. 이런 신랄한 비평가를 보았나."
"아닙니다. 시가 이상하다는 것이 아니에요. 시를 낭송하시는 동안 제가 이상해졌다는 거예요."
"친애하는 마리오, 점 더 명확히 말할 수 없나. 자네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침나절을 다 보낼 수는 없으니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요. 시를 낭송하셨을 때 단어들이 이리저리 움직였어요."
"바다처럼 말이지!"
"네, 그래요. 바다처럼 움직였어요."
"그게 운율이란 것일세."
"그리고 이상한 기분을 느꼈어요. 왜냐하면 너무 많이 움직여서 멀미가 났거든요."
"멀미가 났다고."
"그럼요! 제가 마치 선생님들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같았어요."
시인의 눈꺼풀이 천천히 올라갔다.
" '내 말들 사이로 넘실거리는 배'. "
"바로 그래요."
"네가 뭘 만들었는지 아니, 마리오?"
"무엇을 만들었죠?"
"메타포."
"하지만 소용없어요. 순전히 우연히 튀어나왔을 뿐인걸요."
"우연이 아닌 이미지는 없어."
마리오는 손을 가슴에 댔다. 혀까지 치고 올라와 이빨 사이로 폭발하려는 환장할 심장 박동을 조절하고 싶었던 것이다. 마리오는 걸음을 멈추고 고귀한 수신인의 코앞에 불경스러운 손가락을 바짝 들이대며 말하였다.
"선생님은 온 세상이, 즉 바람, 바다, 나무, 산, 불, 동물, 집, 사막, 비, ... "
"...이제 그만 '기타 등등'이라고 해도 되네."
"...기타 등등! 선생님은 온 세상이 다 무엇인가의 메타포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네루다의 입은 턱이 빠질 듯이 떡 벌어졌다. (30쪽~32쪽)
좀 길다는 거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애초 발췌하면 좋겠다고 접어놓은 30쪽을 펴들고 타이핑을 하면서 멈추고 싶지 않게 되었다.
이 소설은 네루다의 불운한 죽음에 바치는 가장 아름다운 헌사이다. 네루다의 시를 읽어본 적은 없지만 이 책을 읽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네루다의 시를 궁금해 하게 된다. 작품 속에서 가끔 언급되는 네루다의 시가 아주 서정적이고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허물없는 성격,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노 시인, 수집벽이 있어 집 안 가득 수집품을 걸어놓은 노벨상 수상작가, 인간의 삶을 외면하지 않아 정치 현장에 직접 뛰어들고 아옌데 정권을 도왔던 시인, 그러나 바다가 보이는 마을 '이슬라 네그라'를 잊지 못했던, 시인.
마리오가 시를 접하게 되고, 그래서 네루다와 친분을 쌓고, 사랑을 이루고, 아이를 낳고. 어느 초라한 마을에서 빈둥대던 10대 후반의 청년이 시를 느끼고 나서 겪는 세계의 근본적인 전환. 전혀 다른 세계로 들어서는 모습이 정말 아름답고 감동적이다.
그리고 아옌데 대통령의 죽음으로만 알고 있는 칠레, 한-칠레 FTA 정도로만 칠레를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소설은 많은 것을 가르쳐 준다. '연애소설 읽는 노인'의 루이스 세풀베다도 칠레 출신이다. 칠레의 풍광이 궁금해진다. 언젠가 가볼 수 있을까, 이슬라 네그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