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리미 토미히코 장편소설, 밤은 짦아 걸어 아가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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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잘 읽지 않는 일본 문학. 부럽고 배 아파서 잘 읽지 않고 잘 사지 않는다.
후배가 어느 날 공부방에 들고 와서는 "아 형 이 책 너무 좋아요, 막 가슴이 두근대고 설레요" 그러길래 "그러냐"하고 말았다. 그러다 이웃의 어느 블로그에서 이 책을 언급한 것을 읽게 됐고, 이렇게 '우연이 두 번이면 보통 책이 아니다'라는 평소 지론대로 책을 빌려 읽었다.
역시 틀린 말이 아니었다. '가슴이 두근대고 설렌다'라는 표현이 무척 어울린다. 표지에 등장하는 두 인물이 소설의 주인공들이다. 대학 새내기에다 호기심 가득하고 대체로 세상을 아름답게 해석하는 여자 후배, 그 후배를 대학 동아리 모임에서 우연히 만나고는 반해서 반년동안 그녀를 졸졸 따라다닌 남자 선배의 이야기가 큰 줄거리이다.
4장으로 나뉘어 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심해어들' '편리주의자 가라사대' '나쁜 감기 사랑 감기'. 각각의 장이 하나의 에피소드를 중심적으로 다루면서 줄거리가 이어진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는 마치 미야자키 하야오의 '토토로'라든가 다른 여러 애니메이션 영화를 떠올리게 한다. 그러니까 일본의 전통적인 신사 풍경, 연못과 대나무 숲이 있질 않나 온천탕도 있는 기이한 모양의 3층 전차(자동차는 아닌 것 같고 한 칸 짜리 기차가 3층이라고 보는 게 어울린다), 흥청망청한 본토초 거리 같은. 본토초 거리가 어디에 있는 건지도 모르고 가본 적도 없지만 묘사를 따라가다보면 머리 속에서 그 광경이 만화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조금 진지하게 생각해보면, 참 신기한 일이다. 만약 비슷한 소재가 등장하는 한국 소설을 읽는다면, 이 소설처럼 생생한 이미지를 머리 속에 떠올릴 수 있을까? 내가 아는 전통 탈이래봤자 하회탈 양반탈 각시탈 정도가 전부다. 일상과 여러 영상 매체(티브이, 영화, 만화)에서 한국 전통의 여러 소재들을 접하며 살아왔다면 마치 동네 골목길을 떠올리는 것처럼 자연스럽겠지만 거의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어려워할 것 같다. 이런 현상을 '민족의 영혼이 사라지고 있다는 이 통탄해 마땅한 현실!'같은 민족주의적인 이유로 아쉬워하는 게 아니다. 이런 게 다 예술의 소재가 될 수 있는 것이고, 구세대와 신세대를 이어주는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힘 같은 게 되어줄텐데. 유명한 일본 만화들을 보면 거의 다 일본의 전통적인 소재들에서 배경의 원형을 가져오곤 한다(히스토리아, 빈란드 사가 같은 아주 훌륭한 만화들은 그리스 아테네와 덴마크 바이킹이라는 세계사적인 배경을 소재로 삼는다).
여튼, 소설은 환상적인 장면들이 자주 등장한다. 회오리바람에 말려 올라간 잉어들이 갑작스럽게 하늘에서 떨어져 내리고. 귀중한 고서를 얻기 위해 매운 맛 참기 대회에 참가하고. 그렇게 작고 흥미로운 에피소드가 하나씩 진행될 때마다 선배와 후배는 가까워지긴 하지만, 워낙 순진한 후배와 워낙 소심한 선배인지라 마지막까지도 선배는 망설이고 후배는 선배를 생각하면 막연히 '멍-'해지는, 그 감정의 정체를 몰라서 그냥 친절한 선배구나 하고 생각한다.
가장 즐거운 부분은 '편리주의자 가라사대'였다. 일본의 대학 축제를 배경으로 '축지법 고타츠'라든가 '괴팍왕', '대학축제 사무국', 기괴한 조형물 '코끼리 엉덩이', '규방조사단 청년부' 같은 소재들이 긴박하게 어우러진다. 두 주인공도 그 긴박한 사건들에 휘말린다. 읽다보면 진짜 자연스럽게 '으허허허'하고 웃게 된다.
마지막 '나쁜 감기 사랑 감기' 역시 말도 안 되는 에피소드가 중심이지만(이백이라는 노인 한 사람에게 시작된 감기가 도시 전체로 퍼져나가 연말 거리에 사람이 한 명도 다니지 않는다) 두 주인공의 관계가 급진전되면서 본격적인 연애의 시작을 다루는 부분이기도 하다. 감기에 걸려 하숙집 이불 속에 묻혀 있는동안 남자 선배가 고뇌(고백할까? 아냐, 아니야! 그래도 하자!)하는 장면에서 특히 공감했다 하하.
마치 만화같은 소설이다. 그 속에서 싹트는 사랑, 설렘, 두근댐, 망설임. 후배가 보고 반했을만 하다. 나도 무척 즐겁게 읽었다. 읽고 나니 진짜로 내 가슴도 설레었다.
"출판된 책은 누군가에게 팔림으로써 한 생을 마감했다가 그의 손을 떠나 다음 사람 손으로 건너갈 때 다시 살아나는거야. 책은 그런 식으로 몇 번이고 다시 소생하면서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지. 신은 나쁜 수집가의 손에 갇혀 있던 헌 책을 세상에 풀어줌으로써 다시 생명을 갖게 해주는 거야. 그러니 마음씨 나쁜 수집가들은 마땅히 헌책시장의 신을 두려워해야 해!" (심해어들, 112쪽)
"아버지는 늘 나를 여기로 데리고 왔어. 그리고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걸 가르쳐줬어. 나는 여기 있으면 책들이 모두 평등하고 서로 자유자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껴. 그 책들이 서로 연결되어서 만들어내는 책의 바다는 사실 그 자체로 한 권의 커다란 책이야. 그러니까 아버지는 죽은 후에 자신의 책을 이 바다에 돌려줄 생각이었어." (심해어들, 13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