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이문구 연작소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권고마 2008. 11. 26. 01:48
내몸은너무오래서있거나걸어왔다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이문구 (문학동네, 20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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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평리 찔레나무
장석리 화살나무
장천리 소태나무
장이리 개암나무
장동리 싸리나무
장척리 으름나무
장곡리 고욤나무
더더대를 찾아서 

이문구씨가 황석영씨보다 두 살 위였구나. 글과 삶에 충실했던 그는 2003년에 세상을 떠나셨다. 요즘 말 많은 동인문학상 2000년 수상작이기도 하다.

세번째로 읽은 이문구 소설이다. 공교롭게도 충청도 사투리와 농촌의 풍경이 맛깔나게 담긴 소설들만 읽었다. 관촌수필, 우리동네,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 까지. 세 권 모두 처음엔 선뜻 손이 가지 않았지만 다 읽고 나선 몸을 부르르 떨며 감동했고, 우리말 단어와 충청도 방언을 포함해 모르는 단어가 수십개였으며, 읽는 내내 피식피식 혹은 푸하하 하고 웃을 수 있었다.

'나무' 연작에 마지막 단편 '더더대를 찾아서'를 더한 연작소설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앞서 소개한 두 권과는 달리 작가 본인이 '연작 소설'이라고 이름 붙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 정말... '경지를 넘어선'이라는 표현이 아주 딱이다. 그의 여러 소설들은 분명 '농촌 소설'이라는 협소한 표현이 어울린다. 농촌을 다루고 충청도 사투리의 구어체가 가득하다. 여기까지라면 아마 농촌의 풍경과 인물을 오랜 시간동안 관심갖고 지켜보며 애정으로 그려낸 작가 정도의 위치로 자리매김했을 것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위대한 일임은 분명하지만, 이를 두고 독보적이라고 보긴 힘들다. 한국 전쟁과 농촌을 경험한 동년배 작가들이 여럿 있기 때문이다. 충청도 사투리를 소설의 문장으로 훌륭하게 다듬어낸 솜씨가 다른 점이라면 다른 점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관촌수필'과 '우리동네'와 '내 몸은 너무 오래 서 있거나 걸어왔다'로 이어지면서 그의 소설은 더 깊은 것을, 더욱 보편적인 느낌을 담아낸다. 뒤로 갈수록 그 느낌이 짙어지는 것 같다. 농촌 풍경, 농촌 사람들, 매끄럽다 못해 보물같은 충청도 사투리의 구어체 문장은 여전하지만 동시에 더 근본적인 곳에서 마음을 울린다. '장동리 싸리나무'와 '더더대를 찾아서'를 읽어보면 다른 단편들과는 조금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찔레나무, 화살나무, 소태나무, 개암나무, 싸리나무, 으름나무, 고욤나무. 감나무처럼 쓸모있는 열매를 맺는 것도 아니고, 키가 커서 우람한 멋이 있는 것도 아닌 그런 나무들이다. 으름나무는 그늘을 제법 넓혀주는 큰 나무인 것 같긴 하지만 공동체적으루다가 어서 베어내야 할 나무이고, 고욤나무 역시 제법 키는 큰 것 같은데 주인을 사지로 내몰고 만 배은망덕한 나무이다. 소설을 읽다보면 각각의 나무들이 단편 속 인물들의 분신이기도 함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그 인물들 역시 나무들의 처지와 다를 바 없다. 이제는 열매인지조차 모르는 개암나무 같은 사람들. 홀로 꼿꼿하게 살아왔지만 이제는 사라지고 말 사람들.

또한 인물을 이토록 생생하게 그려내는 소설은 눈 씻고 찾아봐도 드물 것이다. 인물의 생생함 이것 하나로만 따져볼 때 이만한 소설이 어디 있겠는가. 인물 하나하나가 고향 마을에 가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

마지막으로, 어쩌면 그의 삶 전체를 관통했을 하나의 태도, 삶이 담겼기에 그리고 삶으로 증명했기에 가장 떳떳한 문장 하나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

무슨 글이 됐건 인간을 옹호하지 않는 글은 쓴 일도 없거니와 쓸 수도 없는 노릇이 아니던가. (더더대를 찾아서, 285쪽) 

"있지. 딱 하나 조심헐 게 있어. 그게 뭣인고 허면 세상이 뒤숭숭헐 적마다 누가 물어보기두 전에 나는 중도여, 중간이여, 허구 돌어댕기는 사람들... 가령 갑 쪽이 세 불리허다 싶으면 갑 쪽으로 찔러박어서 그 공으루 을 쪽에 가 붙구, 또 을 쪽이 세 불리허다 싶으면 을 쪽을 찔러박어서 그 공으루다가 갑 쪽에 가 붙구 허는 사람덜 말여. 저버텀 살구 볼라니 저허구 가까운 사람버텀 궂혀야 허닝께 결국은 남어나는 사람이 없더먼 그려. 이렇게 살을라구 그랬던지 나는 츰서버텀 그런 사람덜을 알아봤어." (장석리 화살나무, 55쪽) 

새벽물은 언제나 조용하였다. 바다가 그리 멀지 않았으므로 바다에 있는 아침 무풍이 저수지에까지 미쳐서 저수지도 함께 아침뜸을 하는 것이었다. 조용한 새벽물은 물김이 피어올랐다. 서리가 많이 내린 날은 물김도 자욱하게 피어올랐다. 물김이 물면에 가득히 골안개처럼 피어오를 때는, 세상에 조용히 있는 물보다 더 생각이 깊은 것은 아무것도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장동리 싸리나무, 195쪽)

이와 같은 풍경에 대한 묘사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자기 자신의 내면일 수밖에 없다. 풍경의 아름다움이란 그것을 발견할 수 있는 눈에 의해서만 포착되는 것이고, 그 눈을 만들어내는 것은 내면이다. ... 자연을 단순한 배경이 아닌 풍경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고립된 주체의 내면이다. (해설 '충청도의 힘', 34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