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헤르만 헤세 장편소설, 황야의 이리

권고마 2008. 11. 21. 01:51
황야의이리(세계문학전집67)
카테고리 소설 > 독일소설
지은이 헤르만 헤세 (민음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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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을 좀 더 다듬어 줬으면 좋았을텐데, 약간 아쉽다.

홍보 문구 때문에 약간 쫀 채로 읽기 시작했다. 하여간 홍보 문구가 사람 위축시킨다. '백년동안의 고독'도 그랬고. 뭐 나로서는 헤르만 헤세의 다른 작품은 읽어본 적이 없기 때문에 이게 가장 대담하다고 하면 다른 작품은 별로 대담한건지 모르겠다. 가장 확실한 표현을 꼽으라면, 기묘하다? '환상적'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하다.

'어려운' 소설은 아니다. 간간이 이해하기 힘든 문장이 있었지만 번역이 어색해서 그런 것일수도 있다(그렇다, 내 오독에는 오역 때문일지도 모른다는 변명의 여지가 있다!ㅎㅎ). 소설 전체의 느낌,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것, 줄거리의 흐름은 그리 어렵지 않다. 주제가 거창한 편이어서 처음에는 당황스럽기도 했는데 차차 적응하면서 읽어 나갔다.

 개인적으로 초,중반이 더 매력적이었다. '편집자 서문'과 '황야의 이리론'까지. 아주 처음에는 '이게 대체 무슨 소리야'라고 생각했지만, 곧 황야의 이리를 만나면서 희열을 느꼈다. 극단적인 우울과 혼돈에 오히려 빠져들게 된다.

한편 초반부까지만 해도 작가의 분신임이 틀림없는 주인공 하리 할러의 방황은, 전통과 옛 아름다움이 점차 사라져가는 속물적인 사회에 대한 부적응 때문이라고만 생각했었다. 그래서 좀 실망스러웠다. 작가 헤르만 헤세 역시 지극히 순수한 옛 예술을 찬양하고 현대적인 예술을 폄하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뒤로 가면서 당시의 시대적인 배경에 대한 언급이 조금씩 등장한다. 그러면서 하리 할러가 왜 방황하고 있는지, 그를 절망하게 만든 것이 무엇이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작품의 시대적 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사실 소설 속에서 그런 말이 나온다).

그러나 이 수기에는 그 이상의 것이 들어 있다. 그것은 한 시대의 기록인 것이다. 할러가 앓았던 영혼의 병은 한 인간의 괴팍한 생각이 아니라, 시대의 병리 그 자체였다는 것을 이제야 알겠다. 그건 할러가 속한 저 세대의 노이로제였으며, 이 신경증 때문에 미천하고 약한 사람들뿐만 아니라, 바로 사상이 깊고,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강한 사람들도 좌초한 것이다. (35쪽)

'황야의 이리'는 1927년에 씌어진 작품이다. 1차 대전에서 패전한 뒤에도 독일은 전쟁에 진저리치기보다 비현실적인 배상금을 물린 연합국들을 증오하는 국수적인 애국주의로 팽배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히틀러의 국가사회주의(나치)당은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가고 있었다. 여러 지식인들이 전쟁이 재발할지도 모른다고 예언했고, 헤르만 헤세 역시 당시 독일 국민들의 모습에 절망했을 것이다. 불과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위대한 철학의 나라였던 독일이 비이성적인 광기로 가득 찬 나라가 되고 말았으니까. 소수의 이성적인 독일인들이 느꼈을 당황스러움과 극도의 절망감을 상상한다면, 소설 속 주인공 하리 할러의 방황이 그리 이상해 보이지는 않는다. 

예술과 아름다움에 대한 철학적인 이야기 하며, 이리와 인간으로 분열된 자아, 인간이 살아가는 이유. 기묘하면서도 전혀 어렵지 않은 문장들이 나를 홀리는 느낌이었다.

헤르미네와 마리아와 파블로, 세 인물을 만나는 중반부는 그 앞 부분과 비교했을 때 조금 평이했다. 그리고 마술 극장을 무대로 하는 후반부는 그 앞 부분에 비해 훨씬 더 상징적인 것 같았다. 사실 좀 어렵기도 했다. 기묘하고 환상적인 분위기가 어려운 상징에도 불구하고 흥미로움을 지속시켜주긴 했지만 말이다.  

리뷰 쓰는 게 무척 어렵고, 힘들다. 이야기할 것은 많은데 어떻게 풀어가야할지. 한 문단이 한 쪽을 넘기도 한다. 인내가 조금 필요하다. 그러나 그 인내의 보상은 엄청나다.

고통받는 개개 인간은 예술 작품을 통해 자신의 운명을 넘어 고양되어서, 행복은 별처럼 빛나고,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은 이 행복을 어떤 영원한 것으로, 그들 자신의 행복의 꿈으로 느끼게 된다. (하리 할러의 수기, 65쪽)

"자네가 저지른 짓이 아직 충분한 불행이 아니기라도 한 것처럼 말하는군! 그러나 이제 그런 비장함이나 살인은 끝내야 하네. 이제 좀 정신을 차리게나! 자네는 살아야 하고 웃음을 배워야 하네. 자네는 인생의 라디오 음악에 귀를 기울일 줄 알아야 하고, 그 뒤에 숨은 정신을 존중해야 하고, 거기서 야단법석을 떠는 걸 비웃을 줄 알아야 하네. 이상이네. 더 이상 자네에게 요구할 건 없네" (하리 할러의 수기, 306~30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