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오쿠다 히데오 소설, 공중그네

권고마 2008. 11. 19. 02:00
공중그네
카테고리 소설 > 일본소설 > 일본소설일반
지은이 오쿠다 히데오 (은행나무,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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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판 126쇄라니. 내가 최근에 산 책들 중에서는 '쇄'의 숫자가 가장 많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마찬가지로 나오키상 수상작이었던 'GO'도 백 단위를 넘었던 것 같다. 요즘 문학 관련 출판계에서는 아마 일본 소설이 가장 매력적인 아이템 아닐까? 한국의 어느 문학상이 이 정도의 판매 기록을 보장해줄까? 조금 답답하고 안타깝고 그렇다. 

한국 소설가들의 삶은 아마 주요 OECD 국가 중에서는 가장 힘든 축에 속하지 않을까? 인구도 적은 편이고, 한국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나라가 있는 것도 아니고 말이다. 물론 출판 산업의 규모는 꽤 큰 편이지만 그것도 뭐 아동 서적과 문제집이 절반이 넘고 인문.사회과학은 초판 터는 데에 사활을 걸어야 하고... 그나마 문학, 그 중에서도 소설인데, 특정 작가들에 대한 편중이 심한 것 같다. 독서 인구는 점점 줄어가고.

그러니까 굳이 이 책을 사서 읽지 않아도 됐을텐데 왜 샀냐면 그 놈의 yes24에서 반값 이벤트란 걸 하더라. 아휴... 예전에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를 읽고 반한 적이 있어서 광고 배너를 화면에서 쉽사리 지나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왠만한 한국 작가보다 인기가 많다보니 요즘에는 도서관에서 빌리기 힘들다.  

이라부 이치로 라는 배 나온 중년의 신경과 의사가 주인공이다. 그의 사무실을 방문한 사람들은 얼이 빠지거나, 이 사람이라면 비밀이 새나갈 염려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서, 나보다 열등한 사람인 것 같아서, 다른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한 사연들을 주저하며 털어 놓는다.

강박신경증, 구토증, 등 여러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그 사연들의 주인공이다. 잘 나가는 야구 선수, 결혼으로 성공을 보장받은 젊은 정신과 의사, 젊고 유망한 야쿠자, 베스트셀러를 내본 적도 있는 젊은 여류작가, 서커스 단의 에이스 같은, 한참 성공 가도를 달리고 있는 인물들이 갑자기 스스로 제어할 수 없는 충동을 경험한다.

사실 읽으면서 나도 약간의 강박증이 있을 거라는 확신이 생기기도 했다. 야구 선수의 증상과 겹치는 부분이 있다. 읽으면서 많이 공감했다. 그리고 나만 그런 게 아닐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등장인물들이 괴로워하는 증상에는 그 증상의 원인이 되는 상황들이 있다. 그런데 이 상황들을 보니,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다. 대부분 그런 상황들 속에서 스트레스 받으며 살고 있다. 흔한 것들 있지 않은가. 외로움, 타인의 시선, 일이 잘 안 풀리고, 경제적 어려움, 경쟁심 같은 것들 말이다.

나 역시 이라부씨를 만나 즐거웠다. 그렇지만 이라부 이치로 같은 인물이 현실에 존재할까? 그런 사람이 있다 한들, 우리 삶에서 만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성공한 인물들의 추락을 구원해주기만 하면, 이미 바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구원의 가능성조차 없을까? 그들은 정신병 같은 걸 앓고 있지 않지만 가난함과 질병과 외로움과 절망과 좌절에 허덕일 가능성이 훨씬 높은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여류작가'에 등장하는 사쿠라씨가 가장 멋있었고, 그 영화감독의 모습이 가장 가슴 아팠다.

흥미진진하고, 쉽게 몰입할 수 있고, 속도감이 넘친다. 웃음이 픽 픽 나오는 장면들이 많다. 좋은 작품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자꾸 위로하려 드는 작품들만 읽다보니 짜증도 난다. 젊고 붉은 소설을 읽고 싶다.

"화가 나는 원인을 밝힌다구요?"
"그렇지. 원인 규명과 제거. 신경의학의 기본이지."
오호, 제법 그럴 듯한 소리를 하네. 아이코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그게 일이면 일을 그만둔다. 근처에 사는 사람과의 문제라면 이사를 간다. 대인관계라면 상대를 눈앞에서 사라지게 만든다." 이라부가 별로 대수로울 것 없다는 투로 말했다. "독약을 먹이고 싶으면 약 이름 정도는 가르쳐줄 수 있지. 에헤헤." 잇몸을 드러내며 빙긋이 미소 지었다.
이봐요. 아이코는 힘이 쭉 빠졌다. 그럴 수 없으니까 인생이 괴로운 거 아냐. (여류작가, 263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