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외수 장편소설, 꿈꾸는 식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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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선 에서 나온 이 판본들은 이제 절판된 것 같다. 해냄 출판사에서 새로 낸다. 내가 가지고 있는 건 2003년 개정 3판이다.
1946년 생이다. 춘천교대를 중퇴했다. 1978년에 첫 장편을 출판한 다음 1981년에 '들개', 1982년에 '칼'을 출판했다. 그 뒤로 꾸준히 글을 써왔다. '꿈꾸는 식물' '들개' '칼' 세 권 모두 처음에는 동문선 에서 나왔다. 고등학교 때 세 권을 모두 사놨다가 얼마 전 추석 때 서울 자취방으로 가져 왔다. 당시엔 사놓고 읽어보지도 않았다. 동생은 읽어본 것 같던데...
이외수씨는 청소년들도 흔히 아는, 그 나이 대의 소설가 중에선 아마 가장 유명할 것이다. TV에도 많이 나왔고... 그의 글을 읽어본 적이 거의 없어서 어떤 글을 쓰는지 모른다. 그렇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외수씨의 산문집은 읽어도 소설을 읽어본 이는 드물지 않을까, 싶다. 그의 소설은 거의 다, 아주 아주 나쁜 놈들이 나오고 그놈들은 아주 아주 나쁜 짓을 일삼는다. '꿈꾸는 식물'은 문체가 그나마 덜 거칠고 까끌한 편인데 '들개'나 '칼'은 훨씬 더하다고 들었다.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 된 작가의 삶으로 미뤄보건대 그는 젊은 시절의 대부분을 가난하게 살았던 것 같다. 그리고 강원도 춘천에서 오래 살아온 것 같다. 그는 자신의 가난에, 아주 미개한 도시의 문화적 수준에 강한 피해의식 혹은 적개심을 품었던 것 같다. 소설 속 화자는 지나치게 결벽하다 싶을 정도의 예술적 기준으로 자신과 자신이 속한 부류의 인간들을 괴롭히는 미개한 사회를 비난한다. 전부 동의하긴 힘들다. 30년 전임을 감안하더라도 그렇다.
첫번째 예. 음악감상실 주인이 친구와 대화를 하는 장면이 있다. 주인은 클래식 애호가고, 클래식 음악만 틀 것을 고집한다. 친구는 팝 음악을 틀지 않으면 가게가 망할 것이고 그러므로 돈을 빌려줄 수 없다고 말한다. 결국 주인은 가게 문을 닫는다. 주인공 민식은 주인의 편이다.
두번째 예. 태하 라는 화가가 등장한다. 태하형은 "팔아먹는 미술"은 하지 않겠다는 순결한 화가이다. 그런데 어느 날 화실 앞에 '먹을 것 구하러 나감'이라는 메모를 붙이고 화실을 떠나버린다. 몇달 뒤 민식은 태하형을 미군기지 근처에서 발견한다. 형은 초상화 가게를 열었다. 민식을 본 태하형은 그래도 흑인만 그리고 있다, 흑인들은 외로움을 가지고 있으니까, 라며 궁색하게 변명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백인과 황인까지 모두 그린다. 이 도시에는 초상화 가게가 하나 밖에 없어서 그런지 장사가 무척 잘된다며, 그러나 부끄러워 하고 민식에게 미안해하고 자신을 비난한다.
내가 동의하지 못하는 것은 왜 팝을 틀어서는 안 되는 것인지, 왜 초상화를 그려 팔면 안 되는 것인지, 이다. 클래식과 비상업 그림만이 순결한 예술이고 팝과 초상화는 때가 탄 것이라는, 아주 편협한 결벽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게 어디가 잘못됐다는 말인가. 물론 클래식 음악 전용 음악 감상실이 망하지 않는다면 참 좋은 일이고, 화가들이 솔직하게 그림을 그리고도 먹고 살 수 있다면 참 좋은 일이지만 말이다. 예술은 세상과 소통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외수씨가 지금까지도 이러한 기준들을 가지고 계신 것 같진 않다. 대중과 소통하고 함께 호흡하려는 그의 노력 때문에 그렇게 보인다.
아주 구질구질하고 지저분한 인간들이 쉽게 등장한다. 그렇지 않은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인 주인공 민식은 세상 거의 모든 것을 믿지 못한다. 지식, 사랑, 가족 등등. 그는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한 채 비겁한 현실을 용인하는 자신을 극단적으로 혐오한다. 한심하다 못해 불쌍할 정도이다.
세상이 아름답다 생각하는 많은 이들의 눈살을 찌푸려놓을 수도 있겠다. 그렇지만 나를 비롯한 다른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그의 작품 속 인물들에게서 만족감을 느낄지도 모른다. 혹은 카타르시스. 적든 많든 인간들은 모두 추잡스러운 것들을 품고 있으니까. 잔인하고 더러운 부산물들로 자신의 종(種)들마저 죽이고 살아가니까. 그렇지만 '꿈꾸는 식물'에서 작가는 그런 최악의 인간들을 그리면서도 아주 조금의 동정과 이해의 여지를 남겨둔다. 다른 작품들에서는 어떨까.
나는 잔인하게도, 자비를 베풀 여지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이해보다는 증오를, 동정보다는 살의를 불러일으킬 그런 인물을 만나고 싶어진다.
이 소설의 뛰어난 점은 품위 있는 삶을 불가능하게 하는 곳에서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 하는 것을 강한 의문형으로 제시해 준 데 있다. 과연 우리는 작가가 품위 있는 사람의 예로 든 시인이 될 수 있을까? 다시 말해서 우리는 화자의 작은형처럼 이 현실 속에서 미칠 수 있을까? 미칠 수 없다면 그 화자처럼 별들을 관찰하는 데 쓰이던, 그 형이 남긴 망원경 렌즈나마 가지고 다닐 수 있을까? 이외수의 <꿈꾸는 식물>은 너무나 심하게 나를 고문한다. ('그 충격적인 섬세한 감수성', 김현, 29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