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논픽션

커트 보네거트 산문집, 나라 없는 사람

권고마 2008. 10. 30. 11:01
나라없는사람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 영미에세이
지은이 커트 보네거트 (문학동네,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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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장가치 충분함, 커트 보네거트의 작품을 읽어본 사람에게 선물하면 최고, 그러나 그의 소설들부터 어서 읽어볼 것.  

2007년 추석 때, 시내에서 만난 친구와 어쩌다 우리 집까지 가게 됐다. 하여간 왜 가자고 했었는지 곰곰히 생각해봐도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 왜 그랬지? 남자 애도 아닌 여자 애였는데. 아마 헤어지는 게 워낙 아쉬워서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고 그랬을 것이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 서울 가는 기차 시간이 급해서 다시 함께 아버지 차를 타고 대구역으로 갔다. 그 전에 집에서 나오다가, 친구와 너무 경황없이 헤어지는 게 아쉽고 반년 뒤에야 다시 보는 게 섭섭해서 아버지 서재와 내 책장을 훑어 보다가 대충 괜찮아 보이는 책 한 권 뽑아 들고 나왔다. 그리고 차 안에서 친구에게 선물로 줬다. 고백하건대 나는 이 책을 읽은 적이 없었다. 아버지가 산 책임이 분명한데 울 아버지가 이런 책을 왜 샀을까 아직도 알 수 없다. 아마 안 읽으셨을 것 같은데. 책이 2007년에 한국에서 출판됐으므로 추석 얼마 전에 이 책을 샀다는 건데 책이 아주 새 책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에게 "내가 읽어봤는데 진짜 괜찮더라"라고 무덤한 척 하면서 선물로 주고 난 뒤 내가 얼마나 찔렸을지 대충 짐작이 가시리라.

150쪽도 안 되는 작은 양장 책이다. '나라 없는 사람'은 보네거트 자신을 말한다. 미국은 더 이상 자신의 나라 같지가 않는 곳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1922년에 태어나 작년에 죽은 커트 보네거트는 아마 한국으로 치면 황석영씨와 비슷한 원로 소설가로 살았다. 그는 평화주의자였고, 반전주의자였으며, 인간들은 두 가지 물체에 중독돼 있는데 알코올과 석유 라고 말하는 생태주의자 이기도 했다.

죽기 몇 년 전, 여든이 넘은 나이에 마지막으로 낸 책이다. 미국 잡지 인디즈 타임스(In these times)에 실은 글을 모아서 펴냈다.

죽음을 앞두고 쓴 글이라고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유머와 농담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릴 때도 가끔 있다. 미국이라는 나라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내가 보기에 진화는 엉터리다. 인간은 정말로 한심한 실패작이다. 우리는 은하계 전체에서 유일하게 생명이 살 수 있는 이 친절한 행성을 교통수단이라는 야단법석으로 한 세기 만에 완전히 망가뜨렸다. 정부는 마약과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마약은 석유 다음이다. 석유란 얼마나 파괴적인가! 당신의 차에 기름을 조금만 넣으면 시속 백 마일로 달리면서 이웃집 개를 깔아뭉갠 다음, 대기권을 찢어발길 수 있다. 호모사피엔스라는 영특한 이름을 달고서 뭘 망설이는가? 아예 박살을 내버리면 어떨까? 누구 원자폭탄 가진 사람? 과거엔 귀했지만 지금은 널린 게 원자폭탄 아닌가? (19쪽)

만일 부모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주고 싶은데 게이가 될 배짱이 없다면 예술을 하는 게 좋다. 이건 농담이 아니다. 예술은 생계수단이 아니다. 예술은 삶을 보다 견딜 만하게 만드는 아주 인간적인 방법이다. 잘하건 못하건 예술을 한다는 것은 진짜로 영혼을 성장하게 만드는 길이다. 샤워하면서 노래를 하라. 라디오에 맞춰 춤을 추라. 이야기를 들려주라. 친구에게 시를 써보내라. 아주 한심한 시라도 괜찮다. 예술을 할 땐 최선을 다하라. 엄청난 보상이 돌아올 것이다.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것을 창조하지 않았는가! (32쪽)

유머는 인생이 얼마나 끔찍한지를 한 발 물러서 안전하게 바라보는 방법이다. 그러다 결국 마음이 지치고 뉴스가 너무 끔찍하면 유머는 효력을 잃게 된다. 마크 트웨인 같은 사람은 인생이 정말 끔찍하다고 생각했고 그 끔찍함을 농담과 웃음으로 희석시켰지만 결국 포기하고 말았다. 아내와 단짝 친구와 두 딸이 죽은 후였다. 나이가 들면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씩 세상을 뜬다. (126쪽)

상상력의 회로가 설치돼 있는 사람들은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 얼굴에서 이야기를 읽어낸다;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얼굴은 그냥 얼굴일 뿐이고. (13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