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박범신 장편소설, 킬리만자로의 눈꽃

권고마 2008. 10. 17. 04:08
킬리만자로의눈꽃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대표소설
지은이 박범신 (해냄미디어,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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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이 요렇게 작은 것 밖에 없나보다.

얼마 전에 '박범신이 읽는 젊은 작가들'이라는 책으로 비로소 이름만 자주 들어온 유명 작가를 만나게 됐다. 고독하고 쓸쓸한 얼굴이 인상적으로 남아 있다. 그 책 리뷰에도 적었지만 박범신씨의 말들에 굉장히 공감했고 비록 말을 활자로 옮겨 접했지만 무척 알찬 좌담회였다고 느꼈다.

소설가로서의 박범신, 70년대에 인기를 얻으며 많은 글을 써왔던 작가, 갑자기 유명해져버린 삶, 세상 온통 보고 듣는 게 작가를 괴롭히는 것 투성이였던 시대를 거쳐온 삶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작가의말 에서 소설은 소설로 봐달라고 부탁했지만 책 곳곳에서 실제 그의 삶에서 가져온 모습이 생생하게 담겨 있다.

나는 정말 알 수 없었다. ... 작가로서의 대접만이 아니라 명사 대접을 받을 때도 많았다.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반갑기도 하고, 어떤 땐 알아주는 걸 당연히 여기기도 했다. 그러면서 정작 소설은 날이 갈수록 새로울 게 하나도 없었다. 적어도 내 자신이 보기에는. 기교만 늘어났을 뿐 영혼의 무게가 실리지 못한 작품들.
나는 소설 기술자가 아닐까. (259쪽)

아마 박범신씨는 황석영씨를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46년생으로 황석영씨보다 3살 어리지만 비슷한 시기에 작품이 유명세를 얻었고 둘 다 남성이고, 무엇보다 시대의 고통을 외면하지 않으며 살았다. 그렇지만 황석영은 보다 시대의 굵직한 고통에 더 가까이 서 있었던 것 같고, 당시의 운동에 직접적으로 참여했다. 삶을 소설로 담아내지 않으려 하는 현대의 젊은 작품들을 아쉬워 하는 박범신씨라면, 가슴 후벼파는 리얼리즘 소설을 썼던 당시의 황석영을 부러워하지 않았을까?

이 작품은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전하는 생생한 고뇌가 감동적이다. 그렇지만 문체나 이야기의 작은 축으로 쓰인 소재들은 조금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소재가. 남성 주인공의 고뇌, 그리고 그를 지순하게 사랑하는 아내와 마찬가지로 순정적인 그의 애인, 그밖에 힘들면 찾곤 했던 여러 정부들. 바람피는 거, 결혼한 사람이 애인 사귀는 거, 실제로 우리 삶에서 아주 은밀히 숨겨진 채로 광범위하게 퍼져 있는 중년의 삶의 모습이라 해도, 좀 구리다. 일단 나로서는 전혀 경험한 바가 될 수 없는 세대적 차이도 있겠지만, 70년대와 80년대에 신문에 주로 연재된 여러 유명 작품들은 주로 주인공들 사이의 사랑과 바람을 다루지 않았나? 확인하진 않았지만 왠지 그랬을 것 같다. 레이디경향, 같은 여성잡지의 느낌이 난다. 좀 전체적으로 구리다, 뭐 그런 느낌. 그러니까 나쁜 의미에서 '구리다'가 아니라 나와 주변 지인들은 다 알고 있는 그런 '구리다'. 이게 뭔소리냐.. 그렇기 때문에 박범신씨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볼 생각이 별로 안 드는 거다. 최근 인터넷 연재 등으로 유명한 촐라체 는 한 번 읽어보고 싶지만 적어도 '킬리만자로의 눈꽃' 이전의 작품들은, 별로...

이데올로기 편향주의자들은 '광주'조차 자기 관념의 세계로만 한사코 끌고 들어가려 했다. 동료 문인들은 뿔뿔이 섬처럼 흩어졌다. 작품조차 제대로 읽어보지 않고, 단지 인상만 가지고 네 편 내 편을 가르는 편가르기가 동료 문인들 사이에서도 다반사로 일어났다. 그런 분위기는 내게 끔찍하고 또 잔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나는 본래부터 관념과 이데올로기를 작품에 깊이 끌고 들어오는 것에 대한 심한 혐오감을 갖고 있었다. 그 혐오감은 광주의 잔인한 바람이 지나가고도 여전했고, 이데올로기 편향주의자들 때문에 어떤 의미에서는 더욱 깊어졌다. 문학은 당연히 삶을 그리는 것이고, 삶은 좌우 이데올로기라는 관념보다 위에 있다고 나는 믿고 있었다. (286쪽)

또 하나 마음에 안 드는 것은, 이데올로기 에 대한 비난이다. 40년대 생의 대부분의 작가들이 이데올로기 를 부정적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그런 것에서 벗어나야 된다, 그렇게. 박경리씨의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책에도 그런 꼭지가 있더라. 이게 황석영씨와 결정적으로 갈리는 점 아닐까. 이데올로기가 그들의 시대에서는 엄청난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가고 불행을 만들어낸 것은 사실이고, 그래서 한참 어린 내가 머리로나마 이해할 수는 있지만, 그래도 이데올로기는 그런 게 아니다. 인간이 이데올로기 없이 정치를 할 수 있나? 세상을 볼 수 있나? 이데올로기, 란 게 사전적으로 원래, 세계관이고 철학이나 마찬가지다. 작가가 현실의 고통을 결과로 보게 된다면 원인을 모색할 것 아닌가? 인간이 자유롭지 못하다, 그냥 시대가 어둡고 엄혹하다, 독재정권이어서다, 뭐 그렇게 나이브한 추리만 할 건가? 어쨌든 자본주의 문제이지 않나? 그리고 현실의 변화는 어떻게든 최종적으로는 제도 정치의 그물을 거쳐야 하지 않나? 정당이 있고 투표를 하고 그런 거다. 끙.

우리들 현실도 불완전하고 부족한 게 많아 짜증나는데 문학작품을 통해서까지 부족한 것만 대하면 어떻게 위로받을 수 있겠느냐고요. 왜 작가는 부족함만을 그려내야 하느냐고요. 그것은..... 그리움 때문입니다. 만월처럼 차 있는 세상, 차 있는 세계에 대한 그리움이 간절하기 때문이지요. 그리하여 문학은 부족함의 미학이며 동시에 그리움의 미학인 것입니다. 우리는 문학작품을 통해서 우리들의 부족한 세계를 확인하고 우리가 애당초 가고자 했던 그리운 이상을 자각합니다. 부족한 현실과 그리운 이상 사이의 간격도 보게 되고, 마침내는 우리에게서 반성을 이끌어냅니다. 무지한 우리에게서. (85쪽)

작가로서의 정직함, 성실성 이런 것들은 정말 모범적일 것 같은 분이다. 내가 잘은 몰라서 함부로 말하는 것이 죄송스럽지만 작가로서보다는 선생님으로서 더 훌륭하실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명지대 출신 젊은 작가들이 많은 것도 같고.

음... 촐라체는 한 번 읽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