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김연수 소설집,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권고마 2008. 10. 15. 00:45
내가아직아이였을때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김연수 (문학동네,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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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도 도서폐업점에서 구한 책! 아 정말 잘 구했다니까. 운도 좋지. 2003년 동인문학상 수상작이고 1쇄가 2002년 11월인데 2003년 10월 당시 1판 5쇄였다. 책도 많이 팔렸겠다. 좋겠다... ㅎㅎ

요즘 조경란 - 주이란 표절 공방사건 때메 안 그래도 아니꼬운 동인문학상과 조선일보가 더욱 미워 보이고 전혀 몰랐던 출판사 세계에 대해서도 조금씩 접하는 게 있어 문학동네라는 곳도 영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프레시안 가면 기사 많다.

김연수씨의 작품은 무슨 복된 새해 라는 단편과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을 읽었는데 둘 다 그닥 마음에 들지 않았다. 특히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은 이름이 확 끌려서 읽었는데 분명 소재도 공감할 수 있는 부분이 많았는데도 별로 감흥이 없어서 조금 실망했다. 근데 이 책은 재밌게 읽었고 이 작가의 솜씨가 어느 정도인지 실감했다. 그렇지만 내 스타일이냐 아니냐는 더 지켜봐야 될 것 같다. 최근에 나온 '밤은 노래한다'는 소재가 워낙 끌려서 샀다. 그의 솜씨에 대한 신뢰도 어느 정도 뒷받침되어 기대하고 있다.

연작소설집이다.

하늘의 끝, 땅의 귀퉁이
그 상처가 칼날의 생김새를 닮듯
뉴욕제과점
첫사랑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노란 연등 드높이 내걸고
호모 사피엔스 사피엔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서른이 넘어가면 누구나 그때까지도 자기 안에 남은 불빛이란 도대체 어떤 것인지 들여다보게 마련이고 어디서 그런 불빛이 자기 안으로 들어오게 됐는지 궁금해질 수밖에 없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다면 한때나마 자신을 밝혀줬던 그 불빛이 과연 무엇으로 이뤄졌는지 알아야만 한다. 한때나마. 한때 반짝였다가 기레빠시마냥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게 된 불빛이나마. 이제는 이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는 불빛이나마. (뉴욕제과점, 80쪽)

"그래 총 쏘기 전에 벌써 죽은 놈이라 카만 나는 도대체 뭘 쏴 죽인 거겠나? 마을에서 영웅대접 받고 집에 돌아와 며칠을 끙끙 앓다가 깨달았다. 잘못했다, 잘못했다, 아무래도 총을 쏘만 안 되는 거였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더라. 그라고 보만 그날 내가 잡은 거는 정녕 멧돼지가 아니었던 거지. 이래 산에 오만 쓸모적은 나무나마 리기다소나무도 살아가고 청솔모도 살아가고 바람도 쉼없이 움직이지만, 정작 그 멧돼지는 이지 죽은 거였응께 말이라." ...

"저 봐라, 리기다소나무도 있고 직박구리도 있다. 저래 다 살아가고 있는 거라. 산 것들 저래 살아가게 하는 일이 을매나 용기 있는 일인가 나는 그때 다 깨달았던 기라. 내가 해수구제한다꼬 사돌아다니민서 짐승들 쏴 죽인 것도 용기 있어서가 아이라 나하고 마누라하고 애새끼들하고 먹고살아갈라고 그런 거라는 걸 그때야 알게 된 거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영동군 상촌면 흥덕리 도라꾸가 세상에서 제일 용감한 사냥꾼인 줄 알았던 거라. 그라고 나니까 어데 약실에 돌멩이 하나도 못 집어넣겠더라."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175쪽~176쪽)

잠시 후 공양주 보살의 입이 열렸다. 하지만 놀랍게도 공양주 보살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아프지 말아라였다. 아프지 말아라, 너무 아파하지 말아라. 그 말에 예정의 눈썹으로 눈물이 맺혀 들었다. 눈물이 예정의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눈물이 턱 끝에 방울 맺혀 곁방 온돌바닥으로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살아생전 셀 수도 없이 많은 바다짐승들의 숨통을 끊은 사람이야. 손에서 피비린내가 떠날 날이 없었단다. 그런 나도 이렇게 한평생 잘 살아오지 않았겠냐? 이제 그만 잊거라. (노란 연등 높이 내걸고, 195쪽)

... 체력단련이 끝난 뒤, 원재는 지친 몸으로 등나무 그늘 돌의자에 앉아 있었다. 어서 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다. 어른이 되면 더이상 자신과도, 동급생과도 싸우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누구에게도 지지 않겠노라고 이를 악물 필요가 없을 것 같았다. 바람에 등잎이 흔들리면서 점점이 드리운 그늘이 어린 얼굴 위로 하늘거리는데도 원재는 자기가 사는 세상에는 아름다운 게 하나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어른이 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 251쪽)

근데 어쨌든 잘 쓴 소설집이라고 생각한다. 심사평에서 말하듯, 통일성이라는 게 있다. 은근하면서 작품 전체에 숨겨진 노란색과 동심원 이 느껴지곤 한다. '노란색'과 '동심원'은 여러 단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재미로만 따지면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가 최고이고 마음을 건드리는 걸로 따지면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가 첫번째고 두번째로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 세번째는 '노란 연등 높이 내걸고'이다. '똥개는 안 올지도 모른다'를 읽고 작가의 말솜씨에 정말 깊이 매료됐다. 정신없이 읽다 문득 독자인 나도 '똥개'를 두려워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에도 지지 말고 바람에도 지지 말고'는 너무너무 내 어린 시절과 깊이 공감하는 작품이었다. '리기다소나무 숲에 갔다가'는 위에 발췌한 부분이 가장 명확하게 보여주는 생명에 대한 메세지가 감동적이었다. '노란 연등 높이 내걸고'는 봉우가 걷는 밤길과 마지막에 예정이 내거는 연등이 서로 연결되면서 다 읽고 난 다음에 깨달아지는 것이 일품이었다. 역시 솜씨 있구나.

나도 이런 소설들을 쓰고 싶다. 내 안에 남아 있는 불빛을 다시 들여다 보고 그려내는 소설. 이 불빛은 무엇일까, 곰곰히 생각하면서 쓰는 소설. 그래서 감동을 만들어내는 소설.

황석영씨가 개밥바라기별 작가의 말에서 밝히듯이, 김연수씨에게는 이 연작소설집이 그의 소설의 전과 후를 가르는 기준이 되지 않았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