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얀 마텔 소설, 파이 이야기

권고마 2008. 10. 11. 02:10
파이이야기
카테고리 소설 > 영미소설 > 영미소설일반
지은이 얀 마텔 (작가정신, 200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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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메모하는 것의 장점은 언젠가 그 구절을 쉽게 인용할 수 있다는 것이고, 마음에 드는 구절의 앞뒤를 다시 읽으면서 부분적으로 책을 다시 읽어볼 수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굳이 시간 들여서 타이핑해놓는다.

하지만 언어는 그런 바다에서 잠겨버리게 마련인 것을. 그 느낌을 맛보고 싶다면 머릿속으로 그려보는 편이 낫다. (28쪽)

책은 3부로 이뤄져 있다. 1부 '토론토와 폰디체리', 2부 '태평양', 3부 '멕시코 토마틀란의 베니토 후아레스 병원'. 주인공 파이 파텔의 경험담을 토대로 쓴 소설이라고 작가 노트에 적혀 있지만 예전에 손석춘의 '아름다운 집'을 읽고 소설 책에서 '작가 후기', '역자 후기', '해설'을 제외하고는 모두 허구의 영역임을 충격적으로 깨달은 바가 있어 쉽게 믿을 수는 없다.

서점에서 일러스트를 곁들인 책을 보았을 때는 문자가 만들어내는 상상은 오로지 독자의 영역인데 왜 일러스트를 곁들인 책을 새로 내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동화책이라면 그럴 수 있겠지만, 책을 읽어본 사람들은 이 책이 아이들을 위한 '동화'로는 별로 어울리지 않다는 것에 동의할 것이다(아닐지도?!).

그런데 책을 읽고보니 나름 수긍이 가던게 조난 초기 오랑우탄, 얼룩말, 하이에나, 3살 난 벵골 호랑이, 파이가 한 보트에서 지내는 부분을 읽으면서 그 장면을 상상하기가 무척 힘들었다. 그들을 둘러싼 세계가 작은 보트가 전부였기 때문에 보트의 각 구조에 대한 명칭이 자주 등장하는데 그게 대체 어느 부분을 말하는건지 전혀 알 수 없었다. 사이드벤치가 어딘지, 십자가 벤치가 어딘지, 방수포 아래란 대체 어느 정도의 크기를 말하는건지? 보트 전체의 길이와 폭 그리고 깊이는 숫자로 설명해줘서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많이 답답했다. 좀 지난 뒤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읽을 수 있었다.

일러스트를 곁들인 판본이 본문에 수정을 가한 게 아니라면 그 책을 읽어도 괜찮을 것 같다.

내 가장 큰 바람은 - 구조보다도 큰 바람은 - 책을 한 권 갖는 것이었다. 절대 끝이 나지 않는 이야기가 담긴 긴 책. 읽고 또 읽어도 매번 새로운 시각으로 모르던 것을 얻을 수 있는 책. 아쉽게도 구명 보트에는 성서가 없었다. (258쪽)

책을 읽으면서 열 쪽 넘게 접어 두었는데 다시 읽어보니 굳이 메모할 만한 구절들은 드물다. 이 책은 세계적으로도 많이 팔렸고, 한국에서도 꽤 많이 팔린 것 같다. 2008년 여름까지 모두 28쇄나 찍어냈다. 개인적으로는 정말 신선한 이야기라는 점에 공감할 수 있었지만 '우와~' 하며 마음 속에서 감탄사를 자아낼 수는 없었다. 사람들은 이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감동한걸까? 절망 속에서도 희망을 놓치지 않은 파이의 모습에서? 동물의 생리를 냉정하게 표현하면서도 그가 없었으면 살아남지 못했다고 말하는 파이에게서 인간과 동물 간의 낭만적인 관계의 가능성을 발견해서? 나는 이 소설은 희망적이기에 아름다운 이야기 보다는, 오히려 냉정하고 잔인한 생존기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런 부분에서 이 소설만의 통찰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무엇보다 3부가 충격적이면서 마음에 들었다. 하지만 다시 읽어보면 생각이 바뀔 가능성도 높다. ㅎ 신 혹은 종교에 대한 부분은 독특하고 매력적이었다. 공감하는 바였고.

파이 이야기와 같이 소설의 처음과 끝이 묘하게 맞물려 있고 소설의 전개가 시간 순을 따르지 않는 소설들은 두 번 읽는 맛이 남다를 것 같다. 지금 막 '백년동안의 고독'을 다 읽었는데 '우와~....' 하며 감탄했다. '백년동안의 고독' 역시 그런 구성으로 이뤄져 있다.

언젠가 시간 나면 다시 읽어봐야겠다. 그때까진 선물하지 말고 가지고 있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