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훈 소설, 홍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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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년 쯤 전에 한 달 조금 넘게 공장에서 일해본 적이 있다. 현대자동차 2차 하청이었다. 공장 전체를 통틀어 막내여서 원래 하는 작업 외에도 누가 결근하면 그 자리 메꾸느라 다른 일도 하고 그랬다. 공기 드릴을 한 손에 쥐고 다른 손에는 나서 다섯 개를 쥔 채 쉴새없이 나사를 박는 게 원래 일이었다. 작업을 마칠 때가 되면 조장 형이 와서 물량을 체크하는데, 나는 항상 모자랐다. 형은 "니 이것밖에 안 했나! 일로 나온나, 내가 한다!"라고 소리 치면서 모자란 물량을 다 채워주곤 했다. 특공대를 나왔는지 특공대 군복 윗도리를 입고 다녔는데 말은 험해도 마음의 근본은 따뜻한 사람이었다.
나는 그곳에서 컨베이어 벨트가 뭔지도 알았고, 실제로 이주 노동자를 가까운 곳에서 만나 이야기도 나눠 봤다. 파키스탄에서 온 그는 타쥬라고 했는데 고향에 아내와 딸이 있다며 사진도 보여줬다. 같은 조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 내 또래였다. 전혀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두달 전까지 내가 있던 곳은 서울, 모두가 다 대학생인 곳이었다.
커피와 비스킷은 다과의 대명사이면서도 한담보다는 권태를 표현하는 것으로 위치가 격하되었다. 저 권태의 여대생들이 그렇게 한 사 년 살아 보니 남는 것은 결혼하기에 적당한 나이가 되었다는 것 말고는 없다고, 차라리 돈이나 벌고 사회 경험이나 하는 게 낫다고 노련하게 말할지라도 그 속에는 아무런 삶의 근력이 없게 마련이었따. 하여 저 솔로몬이 떠들었던, 모든 영화가 다 부질없고 헛되도다, 는 말처럼 부질없고 헛된 게 없었다. 넘치는 잔과 배부름의 여가와 권태를 한번도 맛보지 못한 이들의 마음을 바늘 끝만큼도 짐작하지 못한 소리였다, 그 뇌까림은. 영화가 부질없음을 깨닫기 위해서는, 풍요가 넘실대는 그 강물에 빠져 허우적대 보기 전에는 수천 수만의 말씀이 다 걸레 조각이었다. 아프리카 원주민에게 어떻게 얼음의 맛을 설명할 수 있을까. 손을 담가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것들투성인데, 그 말 외에 어떤 것이 삶을 설명할 수 있을까. (214쪽)
나는 그 공장에서 주야 맞교대가 뭔지 몸으로 경험했고 그게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데 전혀 할 짓이 못된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사회에는 그런 사람이 수도 없이 많이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 말을 할 줄 모르는 경우가 태반이고, 게다가 그들의 삶을 대신 말해주는 사람은 드물다.
한창훈은 자신의 과거를 토대로 과거의 한 분신을 주인공 삼아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대학을 나와 도시를 떠돌다 고향 여수로 흘러든 사내. 우연히 홍합 공장에 취직하게 되고, 그곳에서 만난 아줌마 아저씨들의 삶을 고스란히 소설 속에 담아 냈다. 분명 그들의 삶은 가까운 곳에 있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다른 세계의 것 같다. 소설은 그 세계를 내 곁으로 불러와 주고, 나는 잠깐이나마 인간의 삶이란 게 뭔지를 생각해본다.
이런 날은 아무래도 특별한 날이다. 하늘에서 물 몇 방울 떨어진다고 사람들 마음이 그 새 창호지마냥 녹녹해지는 게 아주 우습지 않은 것도 아니지만 그러나 두루 보면 비라도 좀 내려 봐라, 나는 그 핑계 대고 놀란다, 세상만사 잊어불란다, 소주 몇 잔만 눈앞에 있으면 온갖 시름 떨쳐버릴란다, 작정을 할 만큼 그들은 고달픈 것이다. 아침 여덟시부터 일을 시작하여 종일 서서 팬 작업과 탈판을 하느라 몸의 기운을 다 써버린 다음이었다. (23쪽)
재밌게 읽을 수밖에 없다. 소설은 상상력으로 만든 재미있는 이야기이기도 하겠지만 어쨌든 사람 사는 모양을 담는다. 나는 어떤 식으로든 간에 작가가 사는 시대와 그 시대의 인물들이 소설 속에 담겨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재미가 있어야 읽는 내가 즐거우니 두말할 것 없지만 더해서 내 삶의 범위를 넓혀줄 수 있는 작품을 만난다면 재미에 더해 뿌듯함까지 얻을 수 있다. '홍합'은 그런 소설이다.
삶보다 더 진한 소설이 어디 있겠습니까. 저는 거듭하여 부끄러웠습니다. (작가 후기, 288쪽)
덧. 아 참. 지금은 절판된 책이다. 나는 도서 폐업 처분하는 가게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표지에 옛 도서 대여점의 흔적이 덕지덕지 묻어 있지만, 그래도 은근히 기분이 좋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