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이청준 소설집, 꽃 지고 강물 흘러

권고마 2008. 9. 24. 02:39
꽃지고강물흘러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이청준 (문이당,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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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 지고 강물 흘러
오마니!
들꽃 씨앗 하나
문턱
심부름꾼은 즐겁다
무상하여라?

책을 헐값에 파는 곳에서 운 좋게 발견한 책. 왜, 망한 도서대여점이 비디오를 곁들여 헐값에 파는 그런 곳 말이다. 신촌에서 서강대 올라오는 길에 그런 가게가 있다. 보통 이런 폐업 처리 점포들은 보름이나 길어야 한 달이다. 그런데 이 가게는 아마 한 달이 훌쩍 넘도록 가게 문을 열고 있었다.

들어가면 충동적으로 무언가를 살 것 같은데, 책 값이 어느 정도인지 어림할 수 없어 망설인 게 몇 번. 마침 여윳돈이 생겨 용감히 가게로 들어섰다.

문학 쪽 책장으로 가서 책들을 훑어보니 눈에 익은 작가의 이름이나 제목이 간간이 있었다. 신경숙의 외딴 방,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 같은. 그밖에 2권 정도 더 있었는데 가격이 얼마인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무턱 대고 카운터로 들고 갔다가는 소심한 마음에 모두 사버리느라 출혈이 클지도 모른다. 그래서 고민과 고민 끝에 이청준의 '꽃 지고 강물 흘러', 김연수의 '내가 아직 아이였을 때'를 샀다. 가격은 놀랍게도 2권에 4000원! 최근 들어 태어나 거의 처음으로 내 책을 헌책방에 조금씩 팔아 봤는데, 여느 헌책방 가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청준씨가 돌아가셨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유명한 작가이고 하니 좋은 작품들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다른 소설집 한 권을 마지막으로 두고 작가가 죽기 얼마 전에 쓴 소설들이다.

이 소설집을 읽고 든 생각은, 작가는 무척 노련하고 걸쭉한 이야기꾼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인간과 세태에 대해 놀라울 정도의 통찰 같은 것이 내게 전해져 강한 인상을 남긴 것 같지는 않다.

인상깊은 작품으로 '들꽃 씨앗 하나'와 '문턱'이 있었고, '꽃 지고 강물 흘러'와 '오마니!'는 마음으로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심부름꾼은 즐겁다'와 '무상하여라?'는 오랜 장인의 손길이 만들어내는 매끄럽고 맛나는 문장 이상의 어떤 참신함이라든가 날카로운 직관 같은 것은 없었다.

'들꽃 씨앗 하나'는 16살 쯤 되는 한 소년이 고향으로 재산증명서를 떼러 내려가는 길과, 그것을 떼기 위해 겪는 일들, 다시 서울로 올라와 서류를 제출하러 고등학교를 찾아가지만 결국 문이 닫혀 있어 그러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간다는 줄거리이다. 소년의 눈을 빌려 당시의 주변 환경이 어땠는지 잘 알 수 있었다. 그의 상황을 알기에 더불어 초조해 하면서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순진한 소년에 대한 안타까움과, 어색하다 싶을 정도로 친절한 인물들의 등장에 어색해 하기도 했다.

'문턱'은 소재의 참신함에 놀랐다. 이 단편에는 작가 본인의 소설관 같은 게 자전적으로 조금 들어가 있다고 한다.

반형준은 그 구정빈의 죽음을 자기 소설이 세상과 만나는 문으로 읽고 싶었고, 그래 그의 죽음을 쓰는 일을 제 소설의 문을 열어 나가는 일로 여겼다던가. 하지만 구정빈의 죽음과 그 죽음의 수수께끼가 이야기와 관심의 핵심을 이루는 반형준의 소설을 넘어 그의 죽음을 포함한 생전의 이야깃거리 취재 내용이나 친구에 대한 그간의 소망 따위 구정빈의 삶 전체의 과정에 눈길이 이르고 보면, 구정빈 또한 이미 자신 속에 그의 이웃과 세상을 향한 만남의 문이 마련되어 있었거나, 그 의문투성이 삶 자체가 그 문이었을 수도 있다. 그는 왜 그런 식으로 살다 그렇게 갔는가....? 반형준도 그 일련의 이야기들에 대한 구정빈의 자기 동일시 경향을 말한 대목이 있었지만, 그는 그렇듯 그의 이야기들을 직접 자신의 삶으로 살다 갔을지 모른다는 한 낯선 이웃의 여망에도 불구하고 그 마지막 의문은 여전히 해명할 길이 없는 데다, 그 알 수 없음의 화두야말로 우리 삶과 문학의 영원한 유예의 수수께끼, 숙명적 비의의 문이자 어쩌면 우리 삶 자체일지도 모르니까. (175~176쪽)

책을 들고 다니다 80년대 초반 학번의 한 선배가 이런 말을 했다. 학교 다닐 때 '당신들의 천국'을 읽었는데 가슴이 너무 무거워 그의 다른 작품은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고. 고등학교 때 대충 읽은 기억이 어렴풋하기만 하다. 도서관에서 빌려 다시 읽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