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문구 연작소설, 관촌수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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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교 때 사놓고 읽다가 관두기를 몇 번. 그 사이에 동생은 놀랍게도 이 책을 다 읽은 뒤 날 보고 꼭 읽어보라고까지 말했다. 최근 들어 이문구 선생의 작품을 찾아보려고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마침 추석 때 집에 내려가서 책을 들고 올라와 3일만에 다 읽었다.
초반부에서는 자칫 잘못 하다간 책을 놓을 뻔 했다. 꾹 참고 읽었다. 참 다행이다.
대화체에서 볼 수 있는 이문구 식의 사투리와 방언도 참 훌륭한 맛이지만, 그 더 깊은 근본에 있는, 어린 시절의 관촌 풍경을 이토록 아름답게 새로 그려내는 작가의 힘을 발견하게 된다.
모닥불은 계속 지펴지는 데다 달빛은 또 그렇게 고와 동네는 밤새껏 매양 황혼녘이었고, 뒷산 등성이 솔수펑이 속에서는 어른들 코골음 같은 부엉이 울음이 마루 밑에서 강아지 꿈꾸는 소리처럼 정겹게 들려오고 있었다. 쇄쇗 쇄쇗...... 머리 위에서는 이따금 기러기떼 지나가는 소리가 유독 컸으며, 낄륵 - 하는 기러기 울음 소리가 들릴 즈음이면 마당 가장자리에는 가지런한 기러기떼 그림자가 달빛을 한 옴큼씩 훔치며 달아나고 있었다. 하늘에서는 별 하나 주워볼 수 없고 구름 한 조각 묻어있지 않았으며, 오직 우리 어머니 마음 같은 달덩이만이 가득해 있음을 나는 보았다. 달빛에 밀려 건듯건듯 볼따귀를 스치며 내리는 무서리 서슬에 옷깃을 여며가며, 개울 건너 과수원 울타리 안에서 남은 능금과 탱자 냄새가 맴돌아, 천지에 생긴다고 생긴 것이란 온통 영글고 농익어가는 듯 촘촘이 깊어가던 밤을 지켜본 것이다. 어쩌면 술꾼들을 지켜본다기보다 늦가을 밤에만 이루어질 수 있는 신비로운 정경에 얼이 홀렸던 것인지도 몰랐다. 문득 내 이마에 보드라운 오뉴월 이슬이 맺히는 느낌이 있더니 늣늣한 아주까리 기름내가 코를 가리는 거였다. (209쪽, 공산토월 중)
물론 또한 실감나는 충청도 방언도 정말 재밌다.
"니열 모리면 대가리에 두 가지 털(반백ㅎㅎ)을 가질 작자가 헐 일이 웂으면 죄용히 병이나 고칠 것이지 그게 뭐여, 이 움도 싹도 웂는 자식아."
"인야, 너 잘 들어봐. 우리의 처지를 약진의 발판으로 삼어 창조의 개척의 정신을 기르며 공익과 질서를 앞세워 능률과 실질을 숭상허구, 경애와 신의에 뿌리박은 상부상조의 전통을 이어받는다 - 너 이게 뭔지 잘 알지?" 김이 고개를 가로젓는 게 보였다.
"국민교육헌장도 모르니께 어린애헌테 못된 짓을 헌 거여. 이쌍, 이걸 그냥..." (374쪽, 월곡후야 중)
70년대 말에 마지막 월곡후야 까지 나오면서, '관촌수필' 연작들은 모두 70년대에 씌어진 것들이다. 30년도 더 된 옛날에 쓰여진 것이고, 그 배경은 주로 40년대 후반이다. 이토록 오래된 소설인데도, 중간중간 이해하기 힘든 단어나 표현이 가끔 눈에 밟히는 것만 빼면, 이야기를 따라가는 데에 전혀 무리가 없었다. 술- 술- 읽힌다고 해야 하나. 작가가 평론가의 물음에 답했다는 말이 "성실하게 살다간 시골 사람들의 이야기니까유...." "하도 험한 세상을 봐왔으니까 그것을 겪은 한 사람 한 사람을 적어보려고 하는 건데....." 등이다. 이 작품은 작가의 옛 체험을 담은 사소설(이런 걸 사소설이라고 한댄다)이자, 어린 시절 작가의 주변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모두가 그 나름의 맛이 있지만 어떤 단편은 조금 재미가 떨어지는 것도 있기도 한데, 가령 누워서 책을 읽다 졸리운 기운이 약간 껴지는 정도일 뿐이다(정말 재밌는 작품은 암만 누워 읽어도 졸리운 기운이 오질 않는다). 뭐니뭐니 해도 가장 감동적인 것은,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듯이, '공산토월'이 아닐까 한다. 특히 가장 마지막 부분은 정말이지... 그 맨 마지막 문장이 마치 엄청난 기폭제라도 되어주는 것 같았다.
한 가지 궁금했던 것이... 석공은 왜 주인공네 집안에 그리도 헌신적이었을까? 주인공의 아버지가, 석공의 결혼식에서 노래를 부르고 어깨춤을 춰서? 지엄하신 양반네가 한갓 상것 잔칫상을 축하하기 위해 그런 모습을 보여서? 석공이란 사람의 인품이 무척 훌륭하고, 작가가 살면서 그런 인간형은 보지 못했다고 말할 정도라는 점도 인정하지만, 바로 저 것이 이해가 안 된다.
고은 선생이 만인보 를 쓰는 것도 이 시대를 사는 만 명의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겠다고 작정하고 나선 일이라고 들었다. 나 역시 소설이나 문학의 중요한 역할, 중요한 의미 중에 하나로 당대의 현실을 서사로 담는 것, 그 현실의 평범한 사람들을 작품 속 인물로 빚어내는 것, 이 아닐까, 대충 짧게나마 그렇게 생각하는 편이다.
마지막으로, 이문구 선생과 오랫동안 벗 해온 한창훈 작가의 서평을 소개한다.
http://news.naver.com/main/read.nhn?ode=LSD&mid=sec&sid1=103&oid=020&aid=00003183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