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민규 소설집, 카스테라
|
카스테라
고마워, 과연 너구리야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
몰라 몰라, 개복치라니
아, 하세요 펠리컨
야쿠르트 아줌마
코리언 스탠더즈
대왕오징어의 기습
헤드락
갑을고시원 체류기
그러나 훌륭했던 각오와는 달리, 막상 그 용도에 대해선 뾰족한 생각이 떠오르질 않았다. 고민은 날이 갈수록 깊어갔지만 - 뭐야, 사지선다형이 아니잖아. 친구들은 그런 식으로 나의 고민 자체를 부정했고 - 자식, 보기보다 태평한 성격이네. 선배들은 태평한 얼굴로 그런 대답들을 늘어놓았으며 - 싫어, 재밌는 얘기나 해줘. 재미가 없다는 이유로 여자 애들은 괜한 짜증을 부렸다. 입을 허 벌린 채 나는 생각했다.
환장할 노릇이군. (23쪽, 카스테라 중)
소설집의 제목이자 책 처음에 실린 '카스테라'. 소설집 작품 중에는 이전에 '2007 이효석 문학상 수상작품집'에 실린 '그렇습니까? 기린입니다'를 읽고 무척 인상깊었던 터라, 카스테라 는 도무지 알쏭달쏭했다. "냉장고에 책을 넣는 것 까지는 소중하니까 그렇다 치는데 미국과 중국이라니? 대체 무슨 의미야? 그게 카스테라가 된 건 또 뭐고?"
그렇지만 평론과 작가의말 을 여러번 읽고 다시 읽으니 왜 카스테라인지 대충 알겠다. 여전히 왜 하필 '냉장고'인지는 잘 납득이 안 되는데. 물질과 물질과 물질들이 가득한 지구, 돈으로 살 수 없는 카스테라가 있을리가, 라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가장 간단한 방법은 내가 직접 카스테라를 만들어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박민규의 말이 무슨 말인지 대충 내 식으로 이해했다. 물질과 물질들을 재구성해 카스테라를 만드는 것, 살 수 없는 카스테라도 있음을 증명해 보겠다는 선언. 그는 성공했다. 자신의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카스테라'를 씹으며 눈물 흘렸으니까. 게다가 책도 엄청 팔렸을껄.
이렇게 생각하고 보니 이 단편이 참 마음에 들었다. 왠지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야쿠르트 아줌마', 왠지 '삼미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이 생각나는 단편이었다. 변비라니... 참 기발하다. 온갖 사람들이 '후기 산업사회' 때문에 변비를 앓고 있다니. 푸하하하
삶의 향방은 크게 달라졌다. 입사를 하고, 칠 년간 맞벌이를 해서, 신도시에 지금의 아파트를 마련할 수 있었다. 은근히, 세상이 변하기보다는 직급이 변하길 바라는 사람이, 되어갔다. 어느 가을날인가, 깊이 담배 한 모금을 들이켜다 그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이미 삶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었다. 마흔이었다. 동지가 간 데를 알아도, 깃발은 나부끼지 않았다. 신도시에 온 아내는, 급격히 살이 찌기 시작했다. (184쪽, 코리언 스탠더즈 중)
그냥... 왠지 공감이 가기도 하고 서글프기도 하고. 내 처지는 그러하지 않기만을 기대할 따름.
그밖에 '아, 하세요 펠리컨'도 재밌게 읽었다. 신수정 평론가는 '아, 하세요 펠리컨'의 '오리배 시민연합'을 박민규만의 대안, 같은 걸로 해석했다. 크게 어긋난 해석 같지는 않는데 나로서는 이런 식의 도피, 도피자들의 연합을 통한 새로운 세계의 구축, 같은 게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그것이 하나의 운동인 것은 괜찮다 쳐도 그런 세계가 대안이라는 건... 가능하겠나 싶다. 오히려 그런 도피의 운동을 통해 우리가 어쩔 수 없이 속해 있는 이 세계를 바꿔나가야 되지 않을까?
'갑을고시원 체류기'는.. 너무 애절하고, 또한 무척 마음에 드는 작품이다. '누런 강, 배 한 척' 같은 묵직함이 느껴졌다. 이상하게 지금 들춰보니 마음에 드는 구절을 표시해놓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아마도 단편 전체가 주는 묵직함이 무엇보다 마음에 들어서 특별히 표시해놓지 않은 게 아닐까 싶다. 더구나 '피... 쉬...' 라니, 너무할 정도로 웃기지 않나!
마치 평론가처럼 '왜 기린입니까? 왜 펠리컨입니까? 왜 하필 헐크호건 입니까?'라고 묻는 건 더 의미없지 않을까 싶다. 그냥 서사를 따라 가면 되지 않겠어? 물론 왜 기린인지는 정말 궁금하다. 아마 내 생각엔, 작가의말 에 따르면 박민규씨는 이 소설집의 단편들을 지인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 썼다고 했는데, 각 지인들의 특색을 따 독특한 소재를 단편마다 심어놓았을 것 같다. '기린'이니 '너구리'니 '카스테라'니 '펠리컨'이니 '대왕 오징어'니 '개복치' 처럼 말이다. 새삼 표지를 보고 나서 심증은 더욱 굳어졌다.
4만 부는 넘게 팔렸대든데... 팔릴 만하지만, 여튼 박민규의 인기란 걸 새삼 실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