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픽션

황석영 소설집, 돼지꿈

권고마 2008. 9. 10. 02:48
돼지꿈
카테고리 소설 > 한국소설 > 한국소설일반
지은이 황석영 (민음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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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버에서 검색해보니 이미지가 없네. 그냥 작은 걸로 써야겠다.

수록된 작품이 차례대로 '돼지꿈' '몰개월의 새' '철길' '종노' '밀살' '야근' '탑' '삼포 가는 길' '객지' 이다. 이 중에서 가장 좋았던 건 '삼포 가는 길'이었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돼지꿈'과 '탑'이었다.

'삼포 가는 길'은 수능 보기 전에 모의고사 소설 지문으로 본 기억이 어렴풋하다. 이렇게 좋은 작품일 줄은 몰랐다. 영달과 정씨와 백화, 세 인물의 모습은 당시의 한국 사회의 현실을 보편적으로 공감하게끔 만드는 것 같다. 잘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군더더기 같은 것도 없고 '객지'나 '종노' 같은 투박한 서사보다는, 누구나 느낄 수 있을법한 외로움, 눈길, 낭만적이지 않은 냉정한 현실 같은 걸 잘 그려낸 것 같다. 20쪽 조금 넘는데 젤 마음에 든다!

'돼지꿈'은... 오타가 많은건지 애초 그렇게 쓴건지. 말의 쉼 을 쉼표나 띄어쓰기나 마침표로 제대로 표시해놓지 않아서 대체 이게 무슨 말이야... 게다가 방언이 자주 등장해서 알아먹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인상깊었던 것은 소설의 배경과 등장인물들이, 서울의 판자촌이고 넝마주이들이었기 때문이다. 포이동을 생각했기 때문이다. 포이동 어르신들한테서 옛날 이야기는 자주 들었다. 그분들이 본격적으로 마을을 이뤄 넝마주이를 시작하신 게 80년대 초이고, '돼지꿈'은 70년대 초반에 나왔지만 크게 다를까 싶다. 그냥 그 때 이 사람들은 이렇게 살았구나, 아마 포이동 어르신들도 비슷한 삶을 살아오셨겠구나... 조금이라도 더 그분들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 반가웠다.

'탑'은. 내가 영화 알포인트 를 안 봐서 모르는데 아마 이 단편을 원작(까지는 아니더라도 배경)삼은 거 아닐까? 똑같이 R-포인트 라는 지명이 등장한다.
'탑'과 '철길'은 군대를 배경으로 한 소설인데 특히 '탑'은 작가가 66년부터 69년까지 4년여의 베트남전 참전을 마치고 돌아와 그 다음 해인 1970년에 발표한 소설이다. 황석영씨는 전쟁 당시 포탄 구덩에 몸을 묻으며 '여기서 살아나가면 버림받은 사람들을 위해 살아가겠다'고 마음을 먹었다고 한다. 실제로 70년대 초중반 그의 작품은 아주 약간의 환상도 가미되지 않은, 현실의 인간들을 서사로 담은 게 대부분이다. 그 단적인 증명이 바로 이 '돼지꿈'이라는 소설집이다.
그런데 '탑'이 재밌던 것은 마지막에 미군에 의해 무참히 탑이 무너지는 부분이다. 허망할 정도였다. 5명의 동료가 며칠 새에 죽은 게 억울해서가 아니라 그냥 '허망'한 거 말이다.

'몰개월의 새'는 내가 전혀 모르던 현실이 담겨 있어 재밌게 읽었고. '철길'은 좀 무서워하면서 읽었고. '종노'는 이제는 사라져간, 기억되지 않은 아픈 역사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했고. '밀살'은 전형적인 리얼리즘 문학이 아닐까 싶었고. '야근' 역시 마찬가지.

이 작품들이 작가의 20대 후반 - 30대 초반에 쓰여진 것들이다. 아 정말 대단하다. 한 인간이 이 정도로 세계의 깊은 곳까지 의식적으로 내려갈 수 있을까? 그리고 그곳을 이토록 적나라하게 서사로 담을 수 있을까? 황석영, 정말 강한 사람이다. '강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