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사병은 페스트균(Yersinia pestis)에 의해 발생하는 급성 열성 전염병이다. 페스트균은 현재 주로 아시아, 아프리카, 아메리카 대륙에 부분적으로 분포해 있다. 페스트균은 숙주 동물인 쥐에 기생하는 벼룩에 의해 사람에게 전파된다. 흑사병의 주요 형태는 가래톳 흑사병(bubonic plague), 패혈증형 흑사병(septicemic plague), 폐렴형 흑사병(pneumonic plague) 등이다. 중세에 유럽에서 크게 유행하여 희생자가 많았다. 국내에서는 근래에 발병이 보고된 바가 없다.
* 발병위치 : 전신
yes24에 책표지 사진이 없다. 그래서 표지 이미지 없이 그냥 리뷰 쓰려니 허전하다. 아래는 레포트.
「페스트」 - ‘재난’에 처한 인간, 거기서 ‘윤리’가 시작된다
인간에 대한 물음 ‘이것이 인간인가’
‘이것이 인간인가?’ 일반적으로는 참 오만한 질문이다. 작가가 살았던 시대는 그런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는 시대였다. 만약 그가 2차 대전 동안 목숨을 걸고 레지스탕스 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면 사람들은 그에게 돌을 던졌을 것이다. 실제로 이 작품이 발표된 이후 비판이 거셌다고 한다. 저 엄청난 죄악을 이렇게 흐리게 지칭해도 되는 것인가? 당시 많은 사람들은 ‘저’ 죄악이라고 말했었다. “어느 날엔가는 가버릴 불쾌할 방문자로밖에는 보이지 않았”(92쪽)던 것처럼. 그 때 작가는 그것이 ‘이’ 죄악일지도 모른다고 말한 것이다. 우리들의 집 아래에 숨죽인 채 숨어있는 페스트처럼 말이다. “사람은 제각기 자신 속에 페스트를 지니고 있다”(229쪽)며 ‘우리’의 죄악이기도 하다고 선언한 무시무시한 작품이 바로 「페스트」이다.
재난에 처한 인간
작품을 읽으며 우리 세대들은 재난을 겪어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윗세대들은 한국전쟁을 겪었고, 광주 시민들은 광주항쟁이라는 재난을 겪었고, 세계 곳곳의 전쟁과 가뭄과 지진과 쓰나미와……. 재난은 지구 곳곳에서 끊이지 않는다. 난 참 행운아다. 그래서 재난으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연인과 가족과 이별해야 하는 오랑시 주민들의 모습을 다루는 대목에서 어딘가 생경하다고 느꼈던 것이다. “‘그럴 리가 있나. 그것이 서양에서 없어졌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데’”(44쪽)라는 구절은 2차 대전을 겪은 유럽 사회의 혼란스러움이기도 하다. 평화는 일종의 균형 상태이다. 균형이 깨지면 전쟁의 위협은 빠른 속도로 커져가고 결국 빠르든 늦든 조만간에 전쟁이 터진다. “그러면서도 페스트나 전쟁이 일어났을 때, 사람들은 언제나 아무 대책이 없었다.”(45쪽), “미래라든가, 여행이라든가, 토론 같은 것을 말살하는 페스트를 어떻게 그들이 생각할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은 자유롭다고 믿고 있었다.”(46쪽) 이 구절들은 아마도 오랜 시간동안 인류사에 보편적으로 적용 가능한 예언이 될 것이다. 재난이 닥치기 직전까지도 사람들은 미래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직접적으로 2차 대전 이후의 유럽을 상상하면 이해하기 쉽다. 끊임없이 다른 인간을 타자화하고, 대상화하고, 마침내 인간이 아닌 것으로 사물화하고, 수용소를 만들고, 효율적인 죽음을 고민까지 했던 역사. 그 사이사이에 철학과 예술과 소수의 양심적인 인간들이 안간힘을 써서 제동을 걸었던 역사. 그 제동의 결과물들이 조금씩 쌓여 민주주의가 탄생했다. 또한 작품은 재난 자체, 재난과 인간이 관계 맺는 방식, 재난을 맞닥뜨린 인간들의 모습 등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관찰을 자주 보여준다. 재난은 일견 모두를 평등한 위치에 강제로 끌어내리는 것 같다. “우리가 이제는 남들처럼 되었으니 말씀입니다.”(38쪽) 그러나 재난 속에서도 다시 부자와 빈자의 격차가 발생한다. “페스트가 그 역할에서 보여준 것 같은 효과적인 공평성으로 말미암아 시민들 간에 평등이 강화될 수도 있었을 것인데, 페스트는 오히려 인간의 에고이즘으로 마음속에 불공평의 감정을 더욱 날카롭게 만들어주었다.”(215쪽) 그 무엇보다 모두를 평등하게 만들어줄 것처럼 보였던,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페스트조차 그 안에서 불평등을 끝장낼 수는 없었다. 또한 재난은 대부분의 경우 갑작스럽다. “우리 시민들은 자기들에게 닥쳐오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잘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이 분명했다.” 이런 상황에서 “페스트와 맞설 수 있는 감정”(78쪽)을 갖기는 어려운 일이다. 재난을 경험했을 때, 사람들이 함께 연대하는 일은 결코 쉽지 않다. 사람들은 재난이란 단지 ‘나’를 괴롭히는 것일 뿐이지 너도 괴롭히고 그러므로 우리 모두를 괴롭히는 것이라는 데에는 생각이 미치지 않는다. “페스트의 징후는 음성적인 징후로밖에는 표면화되지 않고 있었”(134쪽)다는 진술은 모든 재난에 대해서 적용 가능하다. 특히 그것이 인간에 의한 것일 때 재난은 더욱 추상적이다. 논리로 정리되지 않은 재난은 잠깐 동안 가시화될 뿐 곧 추상의 시간이 길게 이어진다. 페스트는 단지 “용의주도하고도 빈틈없는, 잘 짜인 하나의 행정사무”에 불과한 것으로 느껴진다. “재난처럼 보잘것없는 구경거리는 없으며, 그 오랜 기간으로 말미암아 무시무시한 불행은 단조로워진다”(166쪽). 재난에 처한 인간들의 모습을 가장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죽음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처음에는 간략한 절차를 갖춰 장례를 치렀으나 이내 여러 시체를 한꺼번에 옮기고, 다음에는 두 개의 구덩이에 각각 남자 시체와 여자 시체를 함께 묻고, 마침내 죽음을 수용할 토지가 부족해지자 화장장 굴뚝에서 연기를 피워 올린다. 단순한 스케치처럼 보이지만 이 부분은 의미심장하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진 것을 두고 “어느새 새로운 질서 속에 자리잡았”(165쪽)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죽음을 대하는 방식과 삶을 대하는 방식은 동전의 양면 같은 것이다. 아무리 피곤한다고 해도 죽은 자를 잊는 것은 쉽사리 정당화될 수 없다. 정당화의 여지가 없을 정도로 죽은 자들을 냉혹하게 처리한 이상 그것은 아예 ‘새로운 질서’라고 부를만한 것이 된다. 가난은 일상적인 재난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타루의 질문에 리외는 자신에게 이 모든 것을 가르쳐준 것은 “가난”이라고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재난은 언제 어느 곳에 어떻게 닥쳐올지 아무도 모른다. 인간을 심판하는 지구의 단죄일 수도 있고,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르는 믿기지 않는 범죄일 수도 있다. 종류야 어떻든 재난은 인간을 다치게 한다. 재난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이 언제나 재난을 염두에 두어야 하는 이유다.
비로소 드러나는 윤리
이 작품에서는 모럴리스트 까뮈, 그의 본격적인 면모를 생생하게 발견할 수 있다. 작가가 살았던 유럽과 페스트가 닥친 오랑시 모두 새로운 윤리를 고민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아래에 서술된 이런 독특한 윤리를 생각해내고 끝까지 밀고 나간 게 참 대단하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위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은 무엇일까. 타루는 “공감”이라고 말했고, 수전 손탁(Susan Sontag)도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이라고 말했다. 과연 그럴까? “…이제는 동정심과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동정이 아무 소용이 없을 때는 동정하는 것도 피곤해지는 법이다”(90쪽)라는 구절에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지하철에서 마주치는 걸인들을 대부분의 사람은 외면한다. 과연 우리는 “공감”하며 살 수 있을까? 그래서 타루는 ‘사람들은 죽기 직전까지 피곤해 한다.’고 말했던 것일까. 작품 내부에서 제대로 설명되지 않는 부분이 있었다. 바로 리외와 타루의 ‘인류애’다. 이것마저 의문에 부친다는 것은 힘겨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작품 전체에 걸쳐 오랑시 시민들은 대체로 부정적으로 그려진다. 게다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은 투로 긍정적인 면을 별로 보여주지도 않는다. 작가는 이 점마저 의문에 부칠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목숨을 걸면서까지 왜 이런 일에 나서냐는 리외의 질문에 타루는 “아마도 나의 도의감 때문”이라고 “이해하자는 것”(124쪽) 때문이라고 답하지만 충분한 대답은 되어주지 못한다. 단지 “인간들은 늘 그게 그것”이지만 “그러나 그것이 그들의 힘, 그들의 허물없는 점이며, 거기서야말로 모든 슬픔을 넘어서, 리외는 자기가 그들과 손잡고 있음을 느끼고 있는 터였다”(276쪽)라고, 패배에 의해 영원히 회복되기 어려운 상처를 입은 인물의 마음에서 이런 고백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 것이다. 인간을 포기하지 않는데서 윤리는 시작된다. 세상은 부조리하다. “승리는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싸움을 멈추어야 할 이유는 못”(122쪽) 될 뿐이다. 리외에게 페스트는 “끊임없는 패배”를 의미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마 비웃음을 자아낼 만한 생각일지도 모르”지만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오직 “성실성”(154쪽)이다. 아마도 이것이 작가가 제시하는 윤리일 것이다. 일시적인 승리에 지나지 않는다 하더라도 고통 받는 이들을 그냥 지나칠 수 없다는 것, 해답은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에 있다는 것, 가만 멈춰서 있지 않고 실천하는 것. 작품에서 보듯 그 이상의 것에 신은 해답이 되어주지 못하고 정치도 해답이 되어주지 못한다. 단 하나, 작품에서 “제삼의 카테고리”라 불리는 것이 있다. 희미한 실마리 같다. “제삼의 카테고리, 즉 진정한 의사로서의 카테고리”(231쪽). 이 카테고리에 아마도 문학이 해당되지 않을까? 리외의 르포는 작가의 손을 거쳐 이야기가 되었고 문학이 되었다. 물론 문학만으로는 그 무엇을 뚜렷하게 해결하기란, 흔하게 볼 수 있는 일도 아니고 또 아마도 어려운 일인 게 분명하지만 문학은 읽는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그려내어 보여준다. 거기서 무언가를 끄집어내도록 만든다. 그리고 인간을 변화시킨다. 작가는 문학을 매개로 새로운 윤리를 제시한다. 신앙의 문제는 작품의 중요한 화두다. 파늘루 신부를 매개로 해서 논의가 촉발된다. “어린애들까지도 주리를 트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199쪽)다는 외침에 파늘루 신부는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랑(신에 대한 사랑)만이 어린애의 고통과 죽음을 해소시킬 수 있”다고 설교한다. 그러나 세계 부조리함 속에서 개인이 온전히 존재해내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라고 말한 작가에게 “자신의 전적인 포기와 자기의 인격의 멸시를 전제”(207쪽)하는 신에 대한 사랑은 이해할 수도 없고 받아들일 수도 없는 것이었다. 까뮈가 무신론자였다는 사실은 당연해 보인다.
성인 - 윤리를 완성한 사람들
먼저 조제프 그랑을 들 수 있다. 그는 작품 전체에서 아주 흥미로운 인물이다. 일단 “자기가 할 말을 생각해낼 수가 없는 사람”(52쪽)이자 “여전히 자기가 할 말을 찾고 있”(53쪽)는 사람이라는 설정이 독자들에게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죽을 때까지도 단 하나의 문장을 다듬는 인물. 기표와 기의 사이의 미끄러짐이 영원히 존재하리란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죽기 직전까지 포기하지 않는 인물. 송민주 학우가 강의 시간에 그랑은 페스트가 퍼지기 전에 이미 자신만의 ‘페스트’를 가진 인물이었다고 말했을 때 무척 신선했다. 그랑은 작품 뒷부분에서 타루가 말하는 ‘성인’에 가까운 모습을 이미 작품 초반부터 보여주고 있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분명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230쪽)라는 구절을 적용하면 그랑은 확실히 긍정적인 인물이다. 더구나 그랑은 ““페스트가 생겼으니 막아야 하죠. 이것은 뻔한 이치입니다. 아! 만사가 이렇게 단순했으면 좋으련만!””(127쪽)이라고 말하며 선뜻 목숨을 걸고 나선다. 리외의 어머니는 변화를 보여주지 않는 인물이다. 수업 시간에 이야기한 것처럼, 그녀는 의문을 품을 정도로 긍정적이다. 그 배경을 명확히 밝혀주지도 않는다. 그냥 “그처럼 착한 마음이 드러나고 있는 눈초리는 언제나 페스트를 이겨내리라고”, 말 그대로 “묘한 단언”(112쪽)을 내릴 따름이다. 스페인 영감 역시 변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리고 고양이에게 침을 뱉는 노인. 만약 그가 죽은 게 사실이라면, 그 역시 변하지 않은 인물이다. 고양이들에게 쏜 총알을 “가래침 같은 납덩어리”라고 비유한 대목이 흥미로웠다. 노인이 뱉었던 것이 ‘가래침’이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중요한 비유 같다. 노인은 고양이들에게 가래침을 뱉었지만 “가래침 같은 납덩어리”를 고양이들에게 뱉는 것과 비교해보면 전혀 추하지 않다. 오히려 장난스러워 보인다. “비록 인간을 구원해줄 수까지는 없더라도 최소한 그들에게 되도록 해를 덜 끼치며 때로는 약간의 선까지도 베”(229쪽)푸는 것이 페스트 환자가 되지 않을 수 있는 길이라면, 리외의 어머니와 스페인 영감과 침 뱉는 노인은 성인에 가까운 사람들이라고 말했던 타루를 이해할 수 있다. 이 인물들은 또한 “신이 없이도 성인이 될 수 있는가”(231쪽)라는 물음에 대한 작가의 대답일 것이다.
결론
우리는 재난을 극복할 수 있을까? 재난 이후의 우리는 그 이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까? 화자의 대답은 부정적이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결코 평화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 또 아들을 빼앗긴 어머니라든가, 친구의 시체를 묻어본 사람에게 있어서 휴전이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260쪽) 이 고백은 슬프다. 재난을 경험한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것에 대한 체험과 기억”(261쪽)일 뿐이다. 체험은 “삶의 체온과 죽음의 이미지”(262쪽)이기에 언제까지나 남겨진 이들을 가슴 아프게 할 것이다. 그러나 타루의 이 말을 잊어서는 안 된다. ““…결국은 페스트 속에서만 살아야 한다니 너무 바보 같아요. 물론 인간은 희생자를 위해서 싸워야만 하죠. 그러나 다른 편에서 아무것도 사랑하지 않게 되고 만다면, 투쟁은 해서 뭣하겠어요?””(232쪽) 비관 속에서도 그 힘을 잃지 않는 유머를 엿볼 수 있는 부분이다. 재난은 언제든 우리에게 닥칠 것이고, 새로운 재난 앞에 우리는 새로운 윤리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반드시 유념할 것. 유머를 잃지 말고, 끊임없이 성실하게!
발췌한 문장들
거기에서도 가장 절실한 슬픔이, 흔히 회화의 평범한 방식으로 표현되기가 일쑤였다.(77쪽)
일하는 남자, 가난, 천천히 막혀가는 장래, 식탁 주위를 저물어가는 저녁 때의 침묵, 그러한 세계에 정열이라는 것이 파고들 여지란 없다.(82쪽)
"글쎄 생각 좀 해보세요, 선생님. 엄밀하게 말해서, '그러나'와 '그리고'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느냐는 퍽 쉬운 편입니다. 그런데 '그리고'와 '그 다음에' 중에서 어느 하나를 택하느냐가 되면 벌써 까다로워집니다. '그 다음에'와 '이어서'가 되면 더 곤란해집니다. 그러나 분명히 가장 곤란한 것은 '그리고'를 쓸 필요가 있느냐를 결정하는 일이죠."(100쪽)
새벽 4시, 보통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며 비록 보람없는 밤이었다 하더라도 그때는 모두들 잠들어 있는 시간이다. 그렇다, 그 시간에는 모두들 잠을 잔다. 그리고 또 그 시간은 마음이 편안한 시간이다. 왜냐하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을 그지없이 소유하고 있다거나, 도는 헤어져야 할 시간이 오며, 다시 만나는 날까지 사랑하는 사람을 결코 깨우지 않을, 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 빠뜨려 놓을 수 있었으면 하는, 애처로운 애정의 거창한 욕망이기 때문이다. (107쪽)
"인간은 하나의 관념이 아닙니다, 랑베르."
... "관념이죠. 아주 짧은 관념이죠. 인간이 사랑에서 돌아서는 그 순간부터 그렇죠. 그런데 바로 우리들은 사랑이 불가능해졌지요. 단념하십시오, 선생님.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기다립시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영웅적인 연극을 부리지 말고 전반적인 해방을 기다립시다. 저는 그 이상 더 나가지 않겠어요."(154쪽)
주민들은 자기들을 서로 가깝게 만들어주는 따뜻한 것을 절실히 요구하고 있으면서도 동시에 자기들을 서로 멀게 만드는 경계심 때문에 그런 요구에 감히 자신을 내맡기지 못하고 있다. 사람들은 이웃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것, 모르는 동안에 페스트에 걸릴 수 있고, 방심하고 있는 틈을 타서 병균이 전염할 수 있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181쪽)
그래서 인간의 모든 불행은 그들이 분명한 언어를 쓰지 않는 데서 온다는 것을 나는 알았습니다.(230쪽)
그러나 또, 한 인간을 사랑한다는 것은 대수로운 일이 아님을, 적어도 사랑이라는 것이 자신의 표현을 발견하는 데 충분히 강력한 것이 못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의 어머니와 그는 언제나 침묵 속에서 서로 사랑할 것이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 혹은 그는 - 일생 동안 자기네들의 애정을 고백하지도 못한 채 죽을 것이다.(261쪽)
정도는 다르지만 도시의 구석구석에서, 그 남자들과 여자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성질이 다르고, 그러면서도 모든 사람들에게 대부분은 곁에 있지 않은 사람을 향해서, 한 육체의 온도를, 애정을, 혹은 습관을 전력을 다해서 외치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흔히 자기도 모르는 중에 인간들과의 우정의 밖에 있다는 것, 편지라든가, 기차라든가, 배라든가 하는 어떤 우정 수단을 통해서, 남들과 어우러져 볼 수 있는 처지도 못된다는 것을 괴롭게 여기고 있었다.(26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