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가 참 아기자기한 책. 책의 주제와도 썩 어울린다. 다만 이미지가 조금 넘치는 것 같다. 
'강'이라는 출판사 처음 본다. 이런 책을 기획할 생각을 하다니, 음, 대단하다, 라고 생각했다.
모두 9명이나 되는 작가들이 쓴 단편을 모아놓은 책이다. 어떻게든 '서울'과 관련된 단편들. 서울 시민들에게 서울 하면 쉽게 생각나는 것들, 예를 들어 '강'이나 '높은 빌딩'이나 '삼청동 풍경'이나 '재개발' 혹은 '철거'나 '지하철', '촛불' 같은 것이 크고 작은 모양으로 작품 속에 녹아 들어 있다.


북촌 _이혜경
1968년의 만우절 _하성란
빈 찻잔 놓기 _권여선
내 비밀스런 이웃들 _김숨
죽음의 도로 _강영숙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_이신조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 _윤성희
크림색 소파의 방 _편혜영
벌레들 _김애란

약 1000만, 즉 전체 인구 중 1/4 가까이 되는 사람들이, 서울특별시 및 경기도에 살고 있다. 그리고 이 1000만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은 연극을 보려면 무조건 대학로에 가야 한다(왜? 극장이 거기 밖에 없으니까). 밴드 공연은 홍대 뿐이다. 20대들이 친구들이랑 만날 때는 주로 강남이거나 신촌, 대학로 등지를 약속 장소로 잡는다. 이 사실들이 의미하는 바를 쉽게 말하자면 한 사회 구성원의 1/4 이 '광화문' 그러면 그 모습을 기억해낸다는 말이다. 그 1/4이, 살면서 한 번 정도는 광화문 교보문고에 가본 적이 있다는 말이다. '한강 둔치'라 하면 그 풍경을 떠올릴 줄 안다는 거다.
한국의 초집중화는 그 자체로 온갖 문제들의 결과이면서 동시에 온갖 문제들의 원인이다. 서울이 흘리는 고름은 점점 더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흘러나오고 있을 뿐이다. 고름의 양은 늘어나고 그 농도는 탁해진다. 작가들로서는 글쓰기가 조금 더 편할지도 모르지만, 동시에 한 번 쯤 서울에 대해서 쓰지 않고 넘어가기가 힘들 것이다. 아래, 김숨씨가 한 말에 이런 부분이 잘 표현돼 있는 것 같다.

... 그때 나는 마포구 동교동에 살았었는데, 지하철을 타도 멀미를 할 만큼 예민하고 쇠약했으며 저혈압에 시달렸다. 나는 서울의 더러운 공기가, 골목만 나가면 쇳가루처럼 들끓는 소음이, 악다구니를 써대는 것 같은 간판들이 나를 병들게 하는 것만 같아 몹시 견디기 힘들었다. 그리고 밤에 어쩌다 지하철을 타면, 어쩔 수 없이, 푹 삶아놓은 달걀만 같은 누렇고 습습한 얼굴들과 마주해야 한다는 것도. 서울은 내게 아직도 그런 곳이다. 그 수많은 지치고 권태롭고 불안한 익명의 얼굴들을 견뎌내야만 하는 곳. 소설을 쓰는 한은 어떻게든. (100쪽, 김숨의 말 중에서)

대부분 재밌게 읽었다. 그 중에서도 인상깊은 작품들을 따로 표시해 두었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오는 이름은 김애란 이다. 이제 막 서른이 되셨을. 정한아, 정지아, '부코스키가 간다'를 쓴 한재호, 모두 20대 작가들이다. 이들의 소설은 하나도 읽어보지 못했다. 내게 가장 20대스러운 작품은 김애란의 단편들이었다. 그래서 나는 김애란의 둘 뿐인 단편집을 아주 소중히 여겼었다(둘 다 어쩌다가 선물해버렸다). 
'1968년의 만우절'은 뭔가 조금 아쉬웠다. 장편으로 쓰면 더 낫지 않았을까? 등장 인물은 많은데 그 각각이 제대로 담겨있지 않은 느낌이었다. 그렇지만 '병원'을 배경으로 삼아 그곳이 불러 일으키는 생각들은 흥미로웠다. 얼마 전 늦은 밤, 혼자 응급실에 몇 번 가본 적이 있다. 병원은 참 기묘한 공간이다. 특히 입원실이나 응급실은 일상에 무척 가까우리라 생각되지만 그 어느 일상의 것도 느끼기 힘든 이질적인 공간인 것 같다. 김숨씨의 '내 비밀스런 이웃들'소설집 '침대'와 느낌이 비슷했다.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다 싶은 부분이 그 때보다 많지는 않았다. 어딘가 설명이 부족하다 싶은 등장 인물들, 괴팍한 노파의 등장 같은 부분은 여전히 기묘하고 알쏭달쏭하다. 그래도 결정적으로 무슨 말인지는 알아 들었다. '죽음의 도로'는 내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주제를 다루고 있어서 마음에 들었다! 힘들어 하는 사람들. 20대에 쌓아놓은 빚을 30대가 되어 다 갚은 뒤 주인공은 우울증에 걸리고, 방황한다. 개새끼 같은 헤어진 남자친구. 이미 결혼한 초등학교 동창 H. 주인공은 죽음을 꿈꾸기 시작한다. H가 말해준 대로 서울에서 가장 죽음에 가까운 도로 '강변북로'를 달린다. 한강대교 북단과 동작대교 북단 사이가 가장 사고발생율이 높은 구간이라고 한다.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은, 9개의 단편 중에서 김애란의 '벌레들'과 함께, 환상적인 느낌을 주는 작품이었다. 주제도 마음에 들 수 밖에 없다. 어제 이 블로그에 올린 글에서 나 역시 '사라져가는 것들'에 대해 썼었으니까. 이야기도 범상치 않고 의미심장하다. '소년은 담 위를 거닐고'는 '조금밖에 남아 있지 않은' 못지 않게 마음에 들었다. 김애란의 '벌레들'은, 개인적으로 이미 김애란씨를 좋아하는 탓도 있겠지만, 9개의 단편 중에서 첫번째 혹은 두번째로 마음에 들었다.

세상에는 손바닥만한 웅덩이처럼 뻔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73쪽, 빈 찻잔 놓기)
고요는 오존층처럼 우리 몸을 보호해주는 투명한 막 같은 거였다. 물이나 햇빛처럼 사람이 사는 데 꼭 필요한. (246쪽, 벌레들)
어쨌든 견뎌내야 했다. 모두가 그러고 있으니까. 모두가 잘, 버티고 있는 것 같으니까. (253쪽, 벌레들)

이전에는 서울에 대해서 쓴 작품이 없었을까? 문득 기억나는 것이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이다. 와... 정말이지 그 여관방의 핵심에서 별로 변한 게 없다. 45년이나 지났는데! 더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시도하고 있다. 세상에서 불행이 판을 치는 것도 여전하다. 사람들은 여전히 외로워 하면서 동시에 성가셔 한다. 나는 안 이 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옆 방에서, 옆 방에서, 사람들이 사람들이 죽어가고 있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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