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이란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불안이며, 불안이란 지속적인 위험을 강조하는 환경 속에서 생겨나며, 또 불안이란 과거 경험이 현재에 아무런 가이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일 때 증가한다. 139쪽

서론

1998년에 발표된 책이다. 불과 10년 전 미국에서 발표된 책이라면 2009년 한국을 설명하는 데 적절할 것이다. 원제는 THE CORROSION OF CHARACTER인데, corrosion의 뜻을 사전에서 찾아보면 ‘1a 부식 (작용);용식(溶蝕) b 부식으로 생긴 것 《녹 등》, 2 <근심이> 마음을 좀먹기’라고 나온다. 번역된 제목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는 잘못된 것은 아니나 원제가 가지고 있는 ‘부식’이나 ‘마음을 좀먹기’ 등 비유적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 같다.

책의 내용 자체가 어려운 것은 아닌데 용어가 생소했다. 사회학 책을 많이 보지 않아 그런 것일 수도 있고 번역이 어색해 그런 것일 수도 있다. risk를 ‘모험’으로 번역한 것과 routine을 단지 ‘일상’으로만 번역한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routine의 사전 정의는 ‘1a 판에 박힌 일, 일상의 일[과정], 일과 b 관례;차례, 기계적 절차, 2 《미》 (연극에서) 틀에 박힌 몸짓[연기];일정한 일련의 댄스 스텝’이다. 단지 일상이라는 뜻에 그치지 않고 규칙적인, 반복적인, 판에 박힌 등이 더해져야 한다. 영어 실력이 뛰어나지 않아 더 찾아볼 수는 없지만 정말로 번역이 이상한 것일 수도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주장이나 분석만 덜렁 내놓지 않는다. 살아가고 있는 구체적인 인간의 삶에 관심을 보인다. 리코, 로즈, 로드니 에버츠, IBM에서 구조조정된 실직자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평범한 대화에서 사회적인 의미를 발견해 낸다. 그리고 그들의 이야기에서 한 사회의 일반적인 현상을 이끌어낸다.

이 책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경제성장, 실업률, 정치과정에 미치는 결과나 메커니즘을 분석하지는 않는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실질적인 부분을 보여준다. 신자유주의의 핵심적인 특징인 ‘유연화’가 현실의 어떤 영역에서 개인들과 접촉하고 있으며, 어떤 방식으로 개인의 삶에 힘을 가하는지를 다루는 것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영역은 바로 ‘노동’이다. 그 결과 개인의 가치관은 어떻게 변화되었고, 평범한 사람들이 노동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갖게 되었는지 탐구한다. 두 눈은 일상을 향하고 있으면서 머리로는 사회 전체를 생각한다.

1. 신자유주의의 현실

신자유주의가 한국에 본격적으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한 것은 1998년 이후부터다. 민영화의 유행, 무역의 대외 개방(FTA 담론의 유행) 등은 정부 정책에 있어 중요한 사건들이었다. 이명박 정부 들어 국내 정치의 비민주적 개혁, 초헌법적 국정운영 등에 가려져 있으나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경제 정책을 추진하는 일관된 지침이다.

그런데 신자유주의는 정책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한 사회가 부를 생산하고 분배하는 방식을 규정하는 하나의 정치경제 프로그램이고, 현실적 모델이다. 신자유주의는 1970~80년대에 미국과 유럽에서 사회민주주의적 경제 체제가 비판받으면서 형성되었다. 이데올로기적으로는 고전적 자유주의의 담론을 상당 부분 자양분으로 삼았으나 현실적 측면에서는 같지 않다.

서유럽과 북유럽의 몇몇 국가들은 신자유주의와 유연성의 거센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내고 있는 것 같다. 노동연계복지 담론을 내세우며 복지비용 감소를 요구하거나 정부 주요 기구를 민영화해야 한다는 주장 등 공격이 아주 사그라든 것은 아니지만 노동 시장에서 배제된 이들을 뒷받침하는 복지 정책, 재진입을 지원하는 직업교육 훈련 등은 여전히 정부가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단결되고 강력한 노동조합과 정치세력화한 노동은 유럽이 신자유주의의의 거센 공격을 성공적으로 방어해낼 수 있었던 결정적 요인이다. 미국은 두 가지 모두 역사적으로 매우 취약했다. 이로 인해 미국의 신자유주의는 매우 강력하게 정책과 일상의 영역으로 파고들 수 있었다. 그 결과 개인의 삶, 특히 노동은 큰 변화를 겪게 된다.

2. 일상의 신자유주의

유연한 조직, 유연한 기업, 유연한 사고, 유연한 경제, … 유연성은 신자유주의 사회에서 훌륭한 덕목으로 칭송받고 있다. 그러나 유연성의 진실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노동하는 일상을 살펴보아야 한다.

유연한 자본주의가 개인의 삶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분을 하나하나 살펴보자(이 책의 목차는 몇 가지 특성들을 한 단어로 개념화한 것이다). 1장 ‘표류’에서 저자는 성공적인 삶을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화이트 컬러 노동자 ‘리코’의 삶을 들여다본다. 리코의 삶의 궤적, 그가 가정과 일터에서 느끼는 감정은 신자유주의 사회의 대다수 구성원들에게 일반화될 수 있는 것들이다 - 자신의 삶이 불안정한 상태에서 ‘표류’하고 있다는 불안감과 불안정함. 여기에 덧붙여 '삶의 서사화'라는 문학적인 표현이 나온다. 리코의 아버지 엔리코는 자신의 삶을 일관된 맥락으로 설명하는데 있어서 어려워하지 않았다. 일은 힘들었지만 그에게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고, 그 목적은 달성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그의 아내는 경제적으로 삶을 계획하는 데에도 어려움이 없었다. 그러나 리코는 일관된 삶을 살 수 없었다. 잦은 이사와 전직 때문에 지속적인 인간관계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리코를 비롯한 신자유주의의 노동자들에게는 일관된 이야기가 가능한 삶, 과거가 무시되지 않고 이야기의 일부로 축적될 수 있는 삶이란 거의 불가능하다.

유연한 자본주의에서 살아가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느끼는 감정이라면 ‘불안감’을 들 수 있다. 발 딛고 서 있는 기반, 생존을 영위하고 가족 경제를 꾸려나가는 경제 체제가 너무나 변화무쌍하다.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적 금융 위기를 예상하긴 힘들다. 중국 펀드가 반토막 나고 한국 경제의 주가가 폭락했던 것을 예상했던 사람들은 거의 없었듯이 말이다. 세계 경제가 잠깐만 요동을 쳐도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은 그 몇 배로 뒤흔들린다. 더구나 한국 사회의 사회 보장 제도는 OECD 국가 중에서도 최하위 권이라 할 수 있어 개인의 경제적 추락을 구원해줄 것이라고는 가족 뿐이다. 가족의 후원을 받아 자신의 신체(노동력)만으로 적자생존의 시장에 뛰어들어야 한다.

포드주의적 생산 방식으로는 더 이상 현대 소비자들의 변덕스러운 욕구를 감당할 수 없게 되었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이 포드주의적인 공장에서 일을 하고 있다. 점점 더 많은 노동 과정이 기계화되고 컴퓨터로 처리되고 있다. 개별 노동자가 자신의 기계가 어떤 방식으로 작동하고 있는지 아는 경우가 얼마나 될까? 거의 대부분의 공장 노동자들은 자신의 직업에 대해 완벽히 알지 못한다. 생산 과정 전반에 대해 이해하고 있다면 많은 노동자들이 자신의 직업에 대해 심리적 애착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모험을 감행하라고 독려하는 것 역시 유연한 신자유주의의 특성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누구나 모험을 감행할 수 있을 정도로 용기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모든 사람이 모험에서 성공을 거둘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모험이 두려운 사람들은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각종 고시를 준비한다. 모험 자체에 뛰어들 수가 없는 - 어학연수 갈 돈이 없고, 대학 등록금이 없는 - 사람들은 아예 온갖 휘황찬란한 성공 사례가 존재하는 저 세계에 대한 관심을 끊는다. 모험에 뛰어들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소수에게만 가능한 일이다.

패자에게는 보호망이 없다. 그들에게는 자신의 위치를 객관화시켜 볼 수 있는 여유도 없다. 당장의 생존이 급박하기 때문이다. 누구도 자신의 삶을 후원해주지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신자유주의는 노동자 본인에게 생산성 향상의 책임을 지우고 있다. 시장에서 퇴출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자신이 알아서 노력해야 한다. 유럽의 경우, 복지 제도는 단지 시장에서 퇴출당한 이들의 생존을 돕는데 그치는 게 아니다. 다양한 방식의 직업 훈련, 육아를 국가가 책임지는 제도, 강력한 노동조합 등은 사회 전체가 경제를 후원하는 역할로 확대된다. 개인의 부담을 덜어줌으로써 생산성 향상으로까지 이어지는 체제이다.

3. 아직은 부족한 대안 - 공동체

저자는 대안에 대해서는 사실 잘 모르겠다고 토로한다. 다만 IBM에서 구조 조정된 노동자들을 보며 저들이야말로 지금까지 인터뷰한 사람들 중 가장 인간적이고 안정감 있는 사람들이라고 말한 대목이 있다. 같은 처지의 동료들과 함께 토론할 수 있었다는 것, 즉 그들에게는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자신을 객관화해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제공하는 ‘공동체’가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공동체가 대안이라고 말할 것 같았으면 대안이 없다고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저자는 공동체를 주목하는 데 있어서 ‘우리’라는 말이 가질 수 있는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날 새로운 체계의 시간 속에서 ‘우리’라는 말은 자기 보호를 위해 사용된다.” 자기 보호는 외부의 적을 설정함으로써 손쉽게 이뤄진다. 그래서 그는 한 가지를 충고한다. 건전한 공동체는 내부의 갈등을 무마하는 데에 그치지 않는다. “사람들 사이의 강한 결속은 시간의 경과 속에서 구성원들 사이의 차이에 주목하고 처리하고 있음을 의미한다.”(209쪽) 오히려 갈등을 해결해 나감으로써 더욱 강한 결속이 가능하다.

즉, 저자는 마을 공동체와 같은 느낌의 물리적이고 공간적인 공동체만이 아니라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함께 대화하고, 토론하는 일 그 자체에 큰(완전하지는 않은) 의미를 부여하는 것 같다. "변화는 땅에서, 집단적인 봉기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개인들 사이에서 심리적 필요에 의해 말로 터져 나오리라는 것이다"라는 저자의 말에 따르자면 대화와 토론을 통해 언어를 생성해내는 작고 다양한 모임들 자체가 변화를 이끌어내는 힘인 것이다. 또한, 이런 모임들이 다양한 형태의 조직체로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도 충분하다. 최근 세계적으로 유행하는 사회적 기업 역시 시민들의 자발적인 조직이 기업적 형태를 빌어 사회에 개입하고자 하는 것이다. 희망이 아주 없는 것만은 아닌 셈이다.

결론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는 한국 사회에 큰 시사점을 주는 책이다. 신자유주의의 정책적 결과와 노동을 둘러싼 제도적 투쟁(비정규직 철폐로 대표될 수 있는)에만 관심을 둘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일상적인 삶에 관심을 가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작업의 결과물은 신자유주의에 대한 가장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비판이 될 수 있다.

물론 한국적 특수성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일상을 보려고 하기도 전에 불법적인 현실이 사회 곳곳에 존재하고 있다. 수많은 비정규직 장기투쟁사업장들이 가장 단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헌법이 보장한 노동3권마저 침해되고 있는 현실은, 학문적 연구의 시도를 무색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내가 이 책은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개인적인 경험 때문이기도 하다. 주변의 여러 친구들이 취업을 했고, 혹은 취업이 안 되어 한 학기를 더 다니려 한다. 취업을 한 친구들은 마초적인 조직 문화와 잦은 야근으로 고통스러워한다. 인턴으로 취업한 친구들은 거기에 불안감까지 가중되어 더 스트레스를 받는다. 더 높은 토익 점수, 더 많은 자격증을 따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린다. 기업들은 더 완벽한 스펙을 요구한다.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것은 퇴직을 앞둔 부모님 뿐이다. 우리들은 ‘공포’에 질려 있다. 이 책은 이러한 심리 상태를 이해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한국 사회에는 온갖 문제가 산적해 있다. 아름다운 성공 사례나 미담 같은 건 난 잘 믿지도 않고, 귀 기울여 듣지도 않는다. 단지 기적처럼 일어난 우연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실제로는 대다수의 사람들이 사회적인 이유로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이들의 일상,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해 보이지만 그 속은 병들어 있는 삶에 시선을 돌려보자. 아마 엄청난 것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인간성은 세계와의 현실적인 연결을 필요로 하며, 남들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고 싶어 한다.
역사는 있되, 어려움을 공유한 이야기는 없고 함께 한 운명도 없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간성은 점차 파괴되어간다. 214쪽
변화는 땅에서, 집단적인 봉기를 통해서라기보다는 개인들 사이에서 심리적 필요에 의해 말로 터져 나오리라는 것이다. ……다만 나는 우리가 왜 인간적으로 서로를 보살피며 살아야 하는지 그 소중한 이유를 제시해주지 못하는 체제라면 자신의 정통성을 오래 보존하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215쪽


신자유주의와 인간성파괴
카테고리 정치/사회
지은이 리처드 세넷 (문예출판사,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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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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