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 엄기호 지음 / 낮은산 / 2009

한겨레21 책 광고에서 이 책을 처음 접했다. 제목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부제 ‘인문학의 눈으로 본 신자유주의의 맨얼굴’도 좋았다. 왜냐하면,
신자유주의는 애초 경제에 대한 이데올로기로 등장한 만큼 경제학의 영역에 속해 있었다. 정치는 대체로 속수무책이었다. 신자유주의의 유입 이전에 정치 사회에서 노동이 어느 정도로 정치세력화되었는지 그리고 노동이 어느 정도로 단결되었는지에 따라 정도를 달리 했지만 공통적으로 전 세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신자유주의’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도 마찬가지로 경제학의 영역에서 가장 치열했고, 그에 뒤이어 정치학이 신자유주의가 민주주의의 가치를 어떤 식으로 침입하고 있는지 분석했던 것 같다.
촛불집회를 통해 약간의 사람들이 정치적 문제 의식을 가지게 되었지만 경제 이데올로기로서 신자유주의는 여전히 강력하게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최근 들어 회복된 이명박 대통령의 성장률을 보라!) 성장률이 얼마며 실업률이 얼마인지, 수치로 드러난 사실은 이데올로기적 왜곡의 좋은 먹잇감이 될 뿐이다. 자신의 계급적 위치를 자각하지 못한 대부분의 한국 시민들, 이미 낙오에 대한 극단적인 두려움으로 성장과 부강으로 불려지지만 실은 생존의 보장일 뿐인 슬로건에 목을 매는 한국 시민들에게 경제학적이고 정치학적인 신자유주의 비판은 더 이상 귀에 들어오지 않고 있다. 
그런데 요즘 들어 경제학과 정치학이 아닌, 다른 방식의 신자유주의 비판이 등장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방식을 두고 사회학적이라고 이름 붙일 수도 있겠지만 ‘인류학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으며 전반적으로 ‘인문학적’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인문학적인 신자유주의 비판을 매우 반겼다. 인문학적인 비판은, 사회라는 경계 안에서 일상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사람들의 삶이 실제로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드러내고, 그들의 변화가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밝히며 여기에 ‘이름’을 붙이는 방식으로 신자유주의를 새롭게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얼마 전에 읽은 리처드 세넷의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에서도 언급된다)는 전형적인 보기라고 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사회의 모든 노동자들이 느끼고 있는 정체모를 불안정함, 미래에 대한 두려움, 낙오에 대한 공포심 등을 탁월한 방식으로 보여준 뒤 거기에 ‘이름’을 붙인다. ‘표류’, ‘일상’, ‘유연성’, ‘리스크’ 등등, 우리의 삶에 존재하는 두려움이 하나의 이름을 얻어 사회적인 현상으로 등장할 때 우리는 나 혼자만의 일이 아님을 알고 안도할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삶을 객관화시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이 책은 독자들에게 단단히 엄포를 놓는다. “이 책을 읽는 독자가 만약에 여기에 나오는 완전한 탈락과 몰락은 극히 일부의 ‘주변부’ 사람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이고, 자신에게는 여전히 소시민적인 삶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대단한 착각이라고.” 책을 펴들자 마자 두번째 쪽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심지어 이 구절이 실린 문단, 그 다음 문단, 그 다음다음 문단에까지 같은 이야기를 점점 더 무섭고 단호한 어투로 강조한다. 이 책에 나오는 고통스럽고 가난한 사람들의 현재는 어중간한 우리들의 미래가 될 거라고 말이다.
이 부분을 읽으며 이를 조언으로 읽어야 할지, 아니면 협박으로 읽어야 할지 헷갈렸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에이 설마, 그래도 그렇지, 너무 심한 거 아닌가...’ 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서 이내 놀랐다.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다. 나는 지금까지 그런 말을 직접 한 적이 거의 없고 오히려 그런 말을 수없이 들어온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지구 환경을 파괴하는 온갖 초국적자본과 오늘날 자본주의적 삶의 방식을 격정적으로 비난할 때, 한국 사회 비정규직의 투쟁을 보며 저들의 삶이 곧 우리의 미래라고 이야기할 때, 한국 사회 장애인들이 실제로 어떻게 살아가고 있으며 그들의 삶에 제도와 여론이 어떤 식으로 다가가야 하는지 열변을 토할 때, 등등, 나는 친구들로부터 ‘에이 설마... 그 정도까지야 되겠냐’라는 이야기를 들어 왔다. 그런 내가 오히려 저자의 이야기를 들으며, 저자가 제시한 사람들의 삶을 접하며, ‘에이 설마, 그래도, 다들 그렇게 되기까지야 할까...’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내 나는 그 원인을 고민하기 시작했다. 스스로 찾아낸 해답은 간단한 것이었다. 눈에서 멀어지니 마음도 멀어진 거라고. 가난, 고통, 억압, 그 모든 비인간적인 장면을 직접 보지 않은지 꽤 오래 되었다. 집회에 나가지 않은지도 1년 가까이 지났다. 지난 1년 동안 나를 둘러싼 세계는 대체로 평화로웠다. 학교도, 신촌 거리도, 공부방도 모두 평화로웠다. 이 평화로움 뒤편에는 가난과 슬픔과 추악함이 생생히 살아있음을 스스로는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오산이었나 보다. 확실히 진리다. 눈에서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진다는 말.

아주 썩 마음에 드는 책은 아니었다. 일단 글자체가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들어가는 말’이라고 해놓고 몇십 페이지에 걸쳐 신자유주의의 역사를 간략히 적어놓은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이렇게 어렵고 진지한 이야기로 바로 들어갈 줄은 몰랐다. ‘작업노트’라 이름 붙인, 각 장의 이야기에 등장하는 개념과 분석틀을 어디에서 얻었으며 그 장의 주제와 관계된 작은 이야기들을 담은 장별 부록을 넣은 것도 썩 좋지는 않았다. 장의 본문 못지 않게 길기도 했고, 영감을 얻은 원 텍스트의 출처와 내용을 소개해주는 것은 좋지만 그에 못지않게 본문이 실해야 그런 친절함에 수긍이 가기 때문이다. 본문이 충실하지 않으면 오히려 혼란스럽고 분산된 느낌이 든다.
책에서 보여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의 삶의 모습은 놀라웠고 생생했다. 글 전체에 걸쳐 저자의 말에서 진정성을 느낄 수 있었다. 그는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다.
나는 신자유주의의 광풍 앞에 여전히 일부의 사람들은 무사할 거라고 생각한다. 내 주위의 많은 친구들은 목동과 강남에 집을 두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나는 여전히 긴장한다. 내 몸 어딘가가 아프다면, 큰 병에 걸린다면, 아니 우리 가족 중 누군가가 그렇게 된다면, 평화롭고 안정적인 가정 경제가 파탄나는 것은 순식간일 것임을 잊지 않는다. 누구도 우리를 구원해주지 않을 것이다. 악마가 잠깐 스쳐 지나가는 것처럼 일어나는 불행들 앞에서 모든 인간은 속수무책이지만, 그 피해를 최소화하면서 슬픔과 괴로움을 극복할 때에는 사회와 지인들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중요하다. 신자유주의는 사회적 보살핌 자체를 극단적으로 소멸시키는 체제임이 분명하고, 부유한 다수의 삶을 보다 가난하게 만들었고 그럭저럭 가난하던 절대 다수의 삶을 언제 위험이 닥칠지 모르는 위태로운 것으로 만들었다. 나는 사회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회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고 믿는 편이다. 나 혼자서는 무엇도 할 수 없다. 아니, 세상 모든 일이 거의 그렇다. 하나보다 둘일 때, 둘보다 셋일 때 할 수 있는 일은 차원이 다를 정도로 차이가 크다. 그러므로 나는 대화와 소통의 시도를 포기하지 않을 생각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말이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지금은 사랑을, 사랑을 이야기하는 사람을 냉소하는 시대이다. 이렇게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에 이제 우리는 서로 사람과 사랑을 소비할 수밖에 없다. ... 모든 것이 시한부가 되어 버린 시대에 시한부를 넘어서려는 인간의 노력인 사랑은 간단하게 무시된다. 여기에 관계에 대한 존중이 있을 리 없다. 우리 모두는 서로의 정서적 안정에 필요한 일시적인 소모품이 되어 버렸고, 우리 모두는 다 외로워졌으며, 그 외로움을 인간의 운명으로 받아들이게 되었다. ... 신자유주의에서 깨져 버린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가장 소박한 꿈, 사랑이다. 76쪽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는 신자유주의의 명령에 맞서는 이런 위로와 돌봄이다. 115쪽

나는 우리 시대에 두 가지 사유의 적이 있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교조주의이며 다른 하나는 상대주의이다. 교조주의는 사유를 두려워하는 데서 생겨난다. 황우석 사건 당시 사람들은 그의 성과에 대해 질문하고 진실을 추구하려고 하기보다는 진실이 폭로하는 결과를 두려워하여 사유하기를 거부하였다. 이것은 사회의 불화를 인정하기보다는 억압하려는 교조주의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태도이다.
반면 상대주의는 쿨함이라는 이름으로 사유하기를 거부한다. 너도 나도 다 다르다고 선언함으로써 그와 내가 어떻게 다른지, 그리고 얼마만큼 다른지에 대해 생각하기를 포기한다. 생각하여 진리에 나아가는 일은 현실의 조화를 깨고 사회에 불화를 다시 불러들이는 무모한 짓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교조주의가 폭력적으로 보수적이라면, 상대주의 역시 딱 그만큼 패배적으로 보수적인 태도이다. 238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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