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파트 공화국, 발레리 줄레조 지음, 길혜연 옮김, 후마니타스, 2007

이색적인 책이다. 일단 이 책의 학문적 바탕인 '도시지리학'이 한국 사회에서 매우 생소한 학문이다. 거기에다 책의 저자는 부제가 말해주듯 '프랑스 지리학자'이다. 저자는 한국의 아파트단지에 대한 도시지리학 연구를 진행해 박사 논문까지 발표했고, 이를 접한 후마니타스 측에서 번역과 편집을 더해 한국에서 책으로 출판했다.
이 책에 대해서는 칭찬하고 싶은 점이 여러모로 많다.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보다 저자의 학문적 성실성이다. 저자는 90년대 초반 한국의 아파트단지를 우연히 목격한 이래 제대로 한번 연구해보기로 결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동료들은 왜 '아파트단지'인지를 이해하지 못했고, 한국에서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은 한국의 아파트단지는 좁은 땅에 많은 사람이 살기 위한 필연적 결과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저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90년대 중반부터 한국에서 직접 살며 연구를 이어갔다. 신공덕동의 오래된 주택가에 살면서 주민들과 친해지고, 강남의 아파트단지를 방문해 주민을 직접 인터뷰하고, 경비원들도 인터뷰했다. 시청 관계자, 건축가들도 만나 보았고 국내에서 출판된 연구 자료들도 상당 부분 참고했다. 이러한 성실성은 책 전반에 걸쳐 등장하는 다양한 도표와 그림, 인터뷰로 증명된다.
고향이 서울은 아닌지라, 사실 몇몇 대학가와 시내 중심가를 제외한 서울의 나머지 지역에 대해서는 모르는 편이다. 잠실에 그토록 많은 아파트단지가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노원구에 밀집된 아파트단지에는 모두 10만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고 있다는 사실도. <아파트 공화국>은 서울에 아파트단지가 어떤 사회.경제.정치적 맥락 속에서 건설되었으며, 초기에는 시민들에게서 그리 큰 환영을 받지 못했다는 것, 그러나 70년대 중반 이후 남동 지역(강남 일대)의 아파트단지 개발로 중산층으로부터 큰 환영을 받았음을 충분한 역사적 증거를 곁들여 설명해 준다. 그 과정에서 정부와 건설 기업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었는지, 정부가 제정한 법률은 어떤 것인까지도 서술되어 있다. 이 정도면 굉장히 자세하고, 그러므로 친절하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정부의 분양가격 제한 정책은 중산층 시민들이 비교적 쉽게 서울에서 주택을 구입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아파트를 소유하게 된 중산층은 80년대 독재 정권의 충실한 지지자였다. 이러한 변화 과정에는 수많은 복부인과 투기꾼들, 그리고 서울에 거주하는 대다수 중산층 시민들의 삶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 주민들의 말을 책에 인용함으로써 개인의 생애사를 통해 아파트의 역사를 보다 생생히 이해하도록 돕는다.
앞 부분은 다소 지루했다. 정책이 탄생하고, 법이 만들어 지고, 즉 건조한 역사 서술과 도표 및 그림 등 실증적인 내용이 주를 이뤘기 때문이다. 중반 이후로 흥미로워진다. 아파트단지와 주민 사이의 상호 관계에 대해 인류학적 시선으로 그리며 분석한다. 놀랄만한 통찰이 간간이 발견되었는데 Lett의 글을 빌어 아파트 경비원의 정체를 폭로한 부분(아래 발췌 참고), 아파트단지를 구입하기 위해 가족 관계를 동원해야만 하는 한국적 현실에 대한 부분(아래 발췌 참고), 다용도실과 베란다가 실은 한옥의 공간 구조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분석 등이 그랬다. 친구들과도 주로 이 부분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셋 모두 가족들이 아파트단지에 살고 있고, 생애의 대부분을 아파트단지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쉽게 공감할 수 있었다.
서울, 아파트단지. 공간이 인간에게 주는 영향은 예상보다 크고 거대하다.


응답자들은 이 무상의 도움을 '갚을 수 없는 빚'으로 생각한다. 이들 중 많은 사람이 이 문제를 부모에 대한 감사와 효도라는 주제로 바꿔 말했다. 한 젊은 응답자는 "부모님이 주신 걸 다 못 갚아요. 그러니까 부모님은 자식한테 하고 나는 내 자식한테 하고.... 이렇게 계속되는 거예요"라고 말했다. ...
이러한 생각은 이른바 유교주의 사회가 어쩌면 드러내지 않고 싶어하는 효도의 경제적 양상을 드러낸다. 자녀들이 부모에게 신세를 졌다고 느끼게 하는 이 빚은 정신적인 동시에 물질적인 것이다. 더구나 여기에는 한국 퇴직 제도의 특성도 관련되어 있다. ... 결국 프랑스의 퇴직연급제와 같은 사회보장제도가 취약한 한국 사회는 퇴직자들로 하여금 개인 저축이나 자녀들의 물질적인 도움에 의존하게 만든다. 216쪽

"이 사람들(발췌자 주:'경비원들')이 장바구니를 날라주고, 화분을 옮기며, 아이를 봐주고, 손가락을 다친 아이에게 반창고를 붙여 주고, 자전거를 옮기는 아이를 도와주고, 메시지를 전달하고 불평과 험담을 친절하게 들어주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 간단히 말해 이들은 경비원 이상이었다. 그들은 봉사를 의무로 저임금에 고용된 하인들이다"(Lett 1998, 115). 228쪽

대단지 아파트는 도처에서 대규모 도시문제뿐 아니라 정치적 초점들을 결집시키며, 여러 형태의 감시체제를 발전시키고 있다. 대단지의 형태는 그 자체로 사회 공간적 차별화를 낳지는 않지만, 적어도 이러한 차별화를 고착화시키는 효과를 갖는다. 또한 대단지 아파트는 장기적으로 관리와 유지 문제를 더 복잡하게 만들고 필연적으로 그 비용을 더 증대시키는 결과를 낳는다. 이는 도시 형태의 견고함을 취약하게 만들어 프랑스에서처럼 쇠락의 길로 접어들거나, 한국에서처럼 일상화된 재개발의 결과를 낳는다. 주택이 유행 상품처럼 취급되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깊이 생각하지 않는 문제이지만, 결론적으로 말해 대단지 아파트는 서울을 오래 지속될 수 없는 하루살이 도시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251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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