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에 나온 책. 대담집이다. 인상 깊었던 대담을 꼽으라면, 신화학자 이윤기씨와 그의 딸이자 철학도인 이다희씨 / 생물학자 최재천씨와 시인 최승호씨 / 평론가이자 프랑스문학 번역가인 김화영씨와 소설가 이문열씨 / 알라딘 사장 조유식씨와 헌책방 '숨어있는책' 사장인 노동환씨 / 중국학자 정재서씨와 매체학자(이렇게 표현해도 되나) 김주환씨 / 영문학자 김우창씨(대담 읽다 보니 '철학자'에 더 가깝다)와 철학자 김상환씨 / 정치학자 최장집씨와 철학자 강유원씨.

솔직히 기획 면에서나 대담의 질적인 면에서나 무척 훌륭한 책이다. 2001년이면 꽤 오래 전인데, 몇달 전 네버 지식인의서재 에서 보기 전에는 전혀 모르고 있었다.
인물들의 면면이 화려하다. 이미 개인적으로 호감을 가지고 있는 김화영, 최장집, 강유원씨 외에도 최재천, 조유식, 노동환, 김주환, 김상환씨의 말을 흥미롭게 들었다. 대다수가 학자이지만 몇몇 분들은 기업가, 시인, 책방 주인, 종교인 등이다. 게중 학자들의 면면도 매우 다양하다. 생물학자, 지리학자, 문학자, 매체학자(혹은 언론학자), 정치학자, 신화학자 등등. 자연과학자들이 조금 더 많으면 더 좋았을텐데, 당시만 해도 한국에서 글 잘 쓰고 인문학적 소양이 넘치는 자연과학자들이 그리 많지는 않았을 것 같다. 10년이 지난 2010년에 이런 책을 낸다고 하면 어떤 사람들을 꼽을 수 있을까? 요것도 재밌는 생각거리다.
대담자의 배치도 멋지다. 예를 들어 한창 뜨고 있던 인터넷 서점 알라딘 사장 조유식씨와 갓 1년 된 헌책방 사장 노동환씨의 대담이 그렇다. 책을 사랑하고, 대체로 좌파적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적이다. 그러나 그들이 업으로 삼고 있는 일에서 알 수 있듯 책의 역할과 사회와의 관계, 책과 서점에 대한 시각과 전망은 때때로 날카롭게 부딪힌다.
김화영씨와 이문열씨의 대담도 그랬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성실한(까뮈 전집을 번역해 내신 분이니) 불문학자라 할 만한 김화영씨는, 곰곰히 읽어보면 자유롭고 개방적인 학자인 것 같다. 아무래도 우파는 못될 분 같고. 그러나 그와 대담을 나누는 이문열씨야 말할 것도 없다. 김화영씨가 그의 보수주의적, 마초적 작품 세계를 지적하는 부분도 등장한다. 가만 보면 아무래도 김화영씨가 나이도 훨 많고 대선배니 이문열씨가 기본적으로 굽히고 들어가는 듯한 느낌이다. 속으로는 무쟈게 대들고 싶은데 가능한 에둘러 말하는 것 같다. 다른 대담에서는 거의 등장하지 않는 출판사 관계자가 대담에 직접 등장하는 것도 그런 상황 때문인 듯 하다. 개인적으로는 김화영씨의 말들에서 크게 공감했고 감동했다. 그래서 발췌도 왕창.
아버지와 딸의 대담인 이윤기씨와 이다희씨의 경우는, 이윤기씨의 말들이 참 멋있었다. 참 간지나는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모든 세기의 축적인 21세기' 어쩌구 하는 대목에서는 보수주의자의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김우창씨와 김상환씨의 대담은 정말 철학적이다. 책의 대담 중에서 유일하게 따라가기 힘들다고 느꼈던 부분이기도 하다. 최장집씨와 강유원씨의 대담은 기대에 못 미쳤다. 나는 좀 더 임팩트가 강할 거라 예상했는데 조금 싱거웠다.

아무래도 대부분 학자들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나도 나 자신의 학문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학부 생활 6년을 보내며 내 전공들이 나와는 맞지 않는다는 사실은 확실하게 깨달았다. 거기에 더해 나는 세계를 사회학적으로, 인류학적으로 보려 한다는 사실도 어렴풋이나마 깨닫고 있다. 사회학이나 인류학을 제대로 공부해본 적은 없지만 이책 저책 읽다 보니 줏어들은 건 있어 가지고 그 정도는 안다. 더불어 나는 공부하는 걸 그리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다.(입시 교육의 후유증이 이제야 치유된건가?) 요즘은 읽고 싶고 공부하고 싶은 것들이 너무 많아 안달날 지경이다. 문학 이론, 정신분석학, 철학, 페미니즘, 사회학, 인류학, ... 이렇다 보니 아무래도 대학원에 가볼까 하는 마음이 들 법하다.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없는 건 아닌데 또 내가 학자적 자질은 그리 뛰어나지 않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수집하고 종합하고 분석하는 건 체질상 별로다. 마음껏 읽고 마구잡이로 상상하고 되는대로 말하고 쓰는 게 훨씬 즐겁다. 나보다 더 똑똑한 애들도 대학원에 안 가는데 내가 굳이 간들 학문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을까, 솔직히 지금도 이런 생각 가지고 있다.
그치만 요즘 대학원 진학 쪽으로 마음이 조금씩 기울고 있다. 학점 형편 없는 게 매우 걱정스러운데 그래도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하는 희망이 있는 편이다. 최소한 3년 뒤의 일이기도 하고. 이게 다 친구의 말 때문이다. 나중에 출판사에서 일하고 싶다는 내 말에 대뜸 "뭔 출판사고? 집 부양해야 되는 거 아이재? 그라믄 공부 계속 해라, 딴 데 한눈 팔지 말고"라고 하더라. 우쒸... 근데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말을 듣고 자기 길을 결정한다. "니는 임마 공부해야 돼", "노래도 잘 부르는데 뭐하고 앉았노? 밴드 안 하나?" 뭐 그런 말들. 세상 그 무엇보다 단정적인 어투로 나의 어떤 자질을 인정해줄 때. 그런가 보다 싶어 노력하다 보면 없던 자질도 생긴다. 성실하게 읽고 쓰다보면 조금이나마 기여하는 게 있긴 있을 거고, 뭐. 아직은 고민, 고민 중이다.

잡설이 왕창 길다. 속지가 코팅지에다 두꺼워 책이 엄청 무겁다. 요게 딱 마음에 안 든다. 대담마다 대담자들의 사진을 싣고 약력을 일일이 설명해준 건 참 좋았는데. 어쨌든 강추. 아래는 무지하게 긴 발췌문들.


이윤기 : (중략) 한 여가수를 짝사랑해서, 그 여가수 노래말 해석하기 위해서 그 나라 말을 공부한다...... 얼빠진 짓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테지. 천만에, 나는 그렇게 생각 안해. 나는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해. 네가 느닷없이 아프리카 가수에게 <뿅>가서 학교 때려치고 스와힐리 어를 배우겠다고 나서도 나는 안 말려. 말리다니. 박수치겠다, 박수.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고 해도, 예술은 그런 정열을 바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다. 예술은, 이런 가늘디 가늘면서도 한없이 절실한 떨림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요즘 한다. / 이윤기.이다희, 19쪽

최승호 : (중략) 코끼리들은 죽은 코끼리의 뼈가 꼭 자기 가족의 것이 아니어도 뼈에 관심을 나타내는 것인가요?
최재천 : 그렇습니다. 자기 가족일 때는 더 각별한 관심을 보입니다. / 최재천.최승호, 66~68쪽

김화영 : 사실, 한국 사람들이 원래는 상당히 체면도 중요시하고 부끄러워 할 줄도 아는 사람들이었는데, 박 대통령 이후 개발 사회로 접어들면서 너무 뻔뻔스러워졌어요. 부끄러움이 없는 시대로 치달았거든요. 그게 어느 정도까지 왔냐 하면, 그전에는 그래도 정신적으로 삶을 윤택하고 보람 있게 하려는 노력이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간데 없고 허구한 날 생산, 효율, 경쟁력, 대통령에서부터 어린 학생에 이르기까지 모든 국민이 싸워 이기는 것, 돈버는 얘기만 해요. 이거 좀 부끄러운 짓 아닌가요?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 몰라요. 가난한 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밥벌이만 하고 고단해 쓰러져 자기만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듯해요. 아무리 가난해도, 아무리 피곤해도 인간은 숨도 쉬고 별도 보고 꽃도 보는 기회를 가져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런데 그런 말 하면 저 사람 배가 불러서 그런다고 해요. ... 김화영.이문열, 163쪽

김화영 : 보통 게으른 독자가 좋아하는 작가는 안도감을 주는 작가죠. 내가 아는 걸 다시 멋있게 말해 주는 사람. 그런데 저들이(발췌자 주:프랑스 쇠이유 출판사) 요구하는 건 내가 보지 못한 것, 지식이 문제가 아니라 내게 낯선 모습을 낯설게 말해서 지금까지 살아온 나의 방식을 불편하게 하는 작품, 그런 걸 말해요. 나는 보통 소설이란 이런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데, 무슨 소설이 이렇지? 하고 의심하게 하는 것. 그러면서도 감히 보잘것없다고는 말할 수 없는, 그 무엇, 이상한 그 무엇을 드러내는 작품, 불편하게 한다는 것은 아마 이런 것이지 싶어요. 그 불편함이란 건 쉽게 안 얻어져요. 그건 정말 벼랑에 선 사람이 얻는 거 아닐까요? 사실 불편함만으로 이루어지는 소설이 어딨습니까? 결국 중심은 불편함인데 그 나머지는 <아, 내 얘기를 쓴 것 같다> 싶은 것들로 이루어져 있죠. 그러다가 번뜩번뜩 내 기대를 배반하는 거죠, 중간에. 그런가 하면 내가 잘 모른 채, 내면 깊숙한 곳에 숨어 있던 내 모습일 수도 있어요. 나를 보는 방법을 엉뚱하게 가르치는 기이한 시선...... 나는 우리 문학이 그런 쪽에도 좀 관심을 가졌으면 해요. 174~175쪽

김화영 : (중략) 농담 섞어서 얘기하자면 하여튼 시인은 조미료 근처에도 가면 안 돼, 조미료 치는 것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어야 해요. 그런데 소설가는 그 유혹에 잘 넘어가요, 사실은. 한국 소설이 제일 느끼하게 느껴질 때가 바로 그런 미원 같은 맛이 날 때예요. 182쪽

김우창 : (중략) 소설을 쓰는 이들도 그렇지요. 특히 소설을 읽는 사람은 인생에 플롯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게 되고 자기 인생도 플롯을 만들어서 살려고 하고, 그러면서 계획을 세워 열심히 살아보려고 노력하면 의미있는 모양이 생기는 것 아니냐, 이런 착각을 하게 됩니다. 근래 들어와서 느끼는 것은, 옛날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아진 것 같지도 않고, 글을 쓰고 책을 보고 있다고 해서 인생의 플롯이 잡혔던 것 같지도 않다는 겁니다. 결국 글쓰는 세계라는 것은 사람 사는 세계하고는 별개의 세계다, 이런 결론이 생기는 것 같아요. / 김우창.김상환, 385~386쪽

김우창 : (중략) 파우스트에 나오는 구절에 <무엇을 찾아 노력하는 사람은 방황하게 마련이고, 방황하는 사람은 결국 잘못을 저질러도 구원된다>, 대충 이런 것이 나오는데 그 구절이 힘이 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해요. 그러니까 스스로 강하게 느끼는 것을 게속해서 추구해 나가면, 설사 거기에서 잘못된 것이 있더라도, 계속 추구하여 노력하는 과정의 일부이기 때문에 있을 수 있는 일이라는 말이 인생을 생각하는 데에 일종의 해방감을 줬다는 느낌이 들어요. 391~392쪽

 

Posted by 권고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