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달 전 쯤 수업 발표 때문에 읽었다. 이젠 <걸리버 여행기>와 이 작품을 엮어 발표를 해야 한다. 몇 가지 작업을 해보고 싶은데 교양 수업이라 조원들의 수준이 걱정이다. 내가 아래와 같은 식으로 <로빈슨 크루소>를 읽었다며 신이 나 떠들었을 때 이해 못 한다는 표정이 역력해 상처 받은 적이 있다.
지난 학기 미셸 투르니에가 <로빈슨 크루소>를 패러디해서 쓴 소설 <방드르디, 태평양의 끝>을 읽고 긴 글을 하나 썼던 적이 있어 더욱 흥미로웠다. 시대적 배경, 디포의 생애와 엮어 읽으면 <로빈슨 크루소>는 18세기 영국의 문화적 혼란을 반영하고 있다. 더구나 근대 자본주의가 막 태동하던 그 시기, 중산층 부르주아가 유럽 밖의 세계를 어떤 식으로 대응했는지를 살펴볼 수 있는 증거물이기도 하다. 흑인 '프라이데이'와 맺는 관계는 계몽주의적 이성이 미개하고 야만적인 존재들을 '인간'으로 만들려 했던 이성의 기획이 실제로 어떤 것이었는지, 당시 백인들이 유럽 밖의 인간을 어떻게 바라보았는지를 알려 준다.
읽은 모든 책에 대해 리뷰를 쓰겠다는 다짐을 1년 째 지키고 있다. 영화나 공연은 몇 편 빼먹은 것 같지만 적어도 책 만큼은 모두 쓰고 싶었다. 아래의 글로 리뷰를 대신하려고 한다. 발표용 글이라 어색한 몇몇 부분은 조금 어색하다. 참, 원본에는 주석이 달려 있으나 포스트에는 달지 않는다. 복사 - 붙여넣기 했더니 자동으로 달리지 않아서. 귀찮다.


간단한 줄거리

28년간의 무인도 생활.
부르주아 상인계층 출신의 로빈슨 크루소, 모험을 떠나다. 배를 타고 떠나 이미 몇 개의 사건을 체험한다. 결국 브라질에서 사탕과 연초농장의 경영자가 되었고 농장 경영을 위해 흑인노예를 구하기 위한 아프리카행 모험을 떠난다. 1659년 9월 배가 파선하여 무인도에 떠내려갔다. 섬 가까이로 떠내려 온 배에서 식료품과 옷, 무기 외에 개와 고양이까지 뗏목으로 실어 날랐다. 그는 산중턱에 천막을 치고 자급자족의 생활을 하였는데, 다행히 맹수가 엇고 기후가 따뜻한데다가 물도 풍부하였다. 그는 밭을 일구고 산양도 길들였으며, 곡식을 보관할 도가니까지 구웠다. 포도로는 술을 빚고 양젖을 짜 먹는 등 생활하는 데는 아무런 불편이 없었다. 이따금 엄습해 오는 고독과 불안을 매일처럼 되풀이하는 노동과 성서를 읽는 것으로 달랬다. 그러나 15년째의 어느 날 로빈슨은 모래사장에 나있는 커다란 사람 발자국을 보고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리고 2년 후에는 바닷가에 흩어져 있는 사람의 뼈 같은 것을 발견하고, 그 섬은 야만인들이 포로를 끌고 와 잡아먹는 곳이라는 것을 알았다. 25년째의 어느 날 아침, 야만인 30여 명이 나타나 포로들을 잡아먹기 시작했는데, 그 중의 하나가 로빈슨 쪽으로 도망쳐 왔다. 로빈슨은 그 흑인을 살려 주고 프라이데이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다. 그를 구조해준 날이 금요일이었기 때문이다. 프라이데이는 충실한 종복이 되어 영어를 익히고 온갖 기술을 배웠다. 3년 쯤 지나서 또 야만인들이 나타났는데, 이때는 포로인 에스파냐인과 프라이데이의 아버지를 구출해 주었다. 27년째에 영국 배가 나타났는데, 그는 선장 편을 들어 선원들의 반란을 진압하고, 악인들을 섬에 남겨둔 채 그 섬을 떠났다. 30여년 만에 돌아온 고국이 낯설어 타국처럼 여겨졌으나, 브라질의 농장에서 막대한 소유권을 되찾아 행복하게 살게 되었다.

1. 서론

『로빈슨 크루소』는 로빈슨 크루소 개인의 경험담을 통해서 유럽 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남성우월주의, 식민지 지배의 정당화라는 다양한 이데올로기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즉 문화적인 아이콘으로 『로빈슨 크루소』는 근대 개인주의의 탄생 신화로 읽히고, 소설로서뿐만이 아니라, 중상주의와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정당화, 영국의 식민주의를 정당화시키는데 매우 적절한 문화자본의 역할을 해왔다.
일단 이 중에서도 중상주의와 개인주의에 바탕을 둔 자본주의의 정당화, 특히 프로테스탄티즘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살펴볼 생각이다.(‘물질과 영혼의 갈등’ 혹은 본질과 신앙 사이의 갈등?) 그밖의 여러 흥미로운 주제들은 이후 발전된 결과물을 통해 적절히 수용할 것이다.

2. 본론 : 미완의 부르주아, 로빈슨 크루소

2-0. 로빈슨 크루소의 인물 변화 과정

섬에 불시착하기 이전 : 충동적이고 격정적, 모험심 강하고 젊은 부르주아 로빈슨. 거의 무신론자였으며 굉장히 독립적인 인물이었다. 그는 흑인노예 무역 상인이면서, 사탕과 연초 농장의 경영자였다. -> 섬에 불시착한 뒤 초기 : 합리적으로 섬을 경영하는 잠재적 자본가이자 노동자인 로빈슨. 점차 유신론자가 되어 가는데 동시에 윤리와 교훈에 대한 언급이 잦아진다. ‘회개한 탕아’. -> 후기 : 철저히 종교인이 된 로빈슨. 직관과 계시를 여러차례 강조함. 이와 대조적으로 전투 상황에서 보여주는 냉정하고 전략적인 사고 방식. 탈출한 뒤 재산을 처리하는 부분에서는 종교적·윤리적·자애로운 자본가의 모습을 보여줌.

2-1. 모험가 로빈슨

섬에 불시착하기 이전의 로빈슨은 모험심이 투철한 비종교적인 인물이다. 그는 안정적인 중산층의 삶을 거부하고 모험의 세계로 뛰어들었다. 식민지 탐험과 개발이 한창 활발하던 당시 상황을 잘 반영하고 있다. 로빈슨 스스로가 후에 가서 후회하듯 당시의 자신은 비윤리적이고 신의 섭리도 전혀 모르는 인간이라고 고백한다.  

2-2. 도착 직후

섬에 도착한 로빈슨은 언제나 부지런히 노동하고,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여 물건을 발명해낸다. 그리고 홀로 섬을 개발해 나간다. 좌절은 매우 짧았다. 문제에 부닥치면 얼마 지나지 않아 바로 해결책을 생각해 내어 실천에 옮긴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독립적이고 씩씩하다. 요새를 만들고, 염소를 가축화하고, 농작물을 경작하고, 보트를 만들고, 섬을 탐험한다. 로빈슨은 낙관적이고, 이성중심적이며, 열정적이었고, 자연을 대상으로 세계를 끊임없이 개조한다. 섬과의 관계에서 로빈슨은 철저히 근대적인 인물이다.
노동자 로빈슨. 그에게는 노동이 유일한 무기였다. 그는 노동 없이는 무엇도 이룰 수 없었다. 또한 그에게는 생산 도구가 있었다. 그러나 아직 이는 ‘자본’이 아니라 ‘잠재적 자본’이었다. 로빈슨은 생산물을 축적하려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도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자신의 생존에 필요한 정도로만 생산물을 저장한다. 홀로 존재하는 사회에서는 교환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런 사회에서는 자본이 탄생할 수 없다. 로빈슨은 자본가가 아니라 아직은 잠재적인 자본가이다. 그러므로 로빈슨은 노동자이면서 동시에 잠재적 자본가였다. 로빈슨 뿐만 아니라 초기 부르주아들은 누구나 잠재적 자본가이면서 노동자였다. 부지런하고 열정적인 로빈슨의 모습은 초기 부르주아지의 열정적인 생활 방식과 그들의 업적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다.

2-3. 중반 이후

로빈슨은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종교적인 인물로 변해 간다. 그의 신앙에 대한 내면적인 갈등과 깨달음이 여러 부분에서 비중있게 자주 표현되고 이러한 낙담과 좌절을 신앙으로서 극복해낸다. 그 과정의 시작은 악몽이다. 표류한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악몽을 꾼다. 꿈 속에 한 남자가 나타나 “넌 모든 일을 겪고도 뉘우칠 줄 모르니 이제 널 죽여야겠다”(87쪽)고 말하며 창으로 그를 죽이려 한다. 그는 이 꿈으로 하느님의 존재에 대하여, 지금까지 신을 모르고 단순히 살아온 것에 대하여 공포감을 느끼며 자신이 느끼지 못하는 동안에도 자신의 삶에 하느님이 존재하셨음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로빈슨이 난파된 배에서 세 가지 물건을 꺼내오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성경이었다.
이제 홀로 남게 된 로빈슨은 모든 것을 하느님께 의지한다. 창세기를 읽으면서 항상 마음의 안정을 찾고 위로를 받곤 한다. 프라이데이(‘금요일’)를 만나고 그와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해지기 시작한 다음부터는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 하느님에 대한 절대성 등을 설명하고 교화하려고 하는 시도를 한다. 이는 그 당시 사회를 지배했던 종교적 신념을 잘 표현해주는 것으로 기독교의 하느님이 사회의 모든 것을 관장하는 지배적인 존재로 여겼던 당시의 상황에서는 당연한 일로 여겨졌을 것이다.
개신교도 로빈슨 크루소는 근면과 섭리의 윤리를 신봉한다. 베버의 저서 『개신교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 다루는 주제가 바로 이 부분이기도 하다. 종교인이 된 후반부의 로빈슨은 비이성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도 한다. 직관과 계시를 강조하는 것이 단적으로 그러하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현실의 사건에 대응하는 방식은 여전히 치밀하고 계산적이다. 결론적으로, 로빈슨 크루소는 칼뱅주의의 전형적인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언뜻 보기에는 모순적인 것처럼 보이는, 냉정한 이윤추구자와 자애로운 자선가의 양면성(‘오른손에는 성경을 왼손에는 회계장부를 든 이중적 인격자’)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근대 초기의 부르주아이자 칼뱅주의자인 것이다.  

3. 결론

그러므로 로빈슨은 프로테스탄트 자본주의의 전형이지만, 미완의 부르주아라고 볼 수 있다. 신과 직관과 계시 따위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는 진정한 부르주아는 18세기 후반에 가서야 비로소 탄생한다. 로빈슨은 아직 덜 여문, 그 속에 갈등의 여지를 안고 있는 인물인 셈이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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