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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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W.G. 제발트 (창비,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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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이란 때로 일종의 어리석음처럼 느껴진다. 기억은 머리를 무겁고 어지럽게 한다. 시간의 고랑을 따라가며 과거를 뒤돌아보는 것이 아니라, 끝 간 데 없이 하늘로 치솟은 탑 위에서 까마득한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183쪽

부모님이 겪은 고통과 나 자신의 고통에서 벗어나보려고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노력도 많이 했고, 이렇게 은둔생활을 하는 가운데 간혹 영혼의 안정이 유지되는 때도 없지 않았지만, 학창시절에 나를 덮쳤던 그 불행이 내 안에 박아놓은 뿌리는 너무나 깊었네. 그 불행은 거듭 땅을 뚫고 나와 사악한 꽃을 피우고, 독기 품은 잎으로 내 머리 위에 천장을 만들었지. 그 천장은 지난 몇년 동안에도 내게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나를 어둠으로 덮었네. 240쪽

품격 있는 유럽의 여러 매체들로부터 찬사를 얻은 소설. 미국에선 수전 손택의 열광적인 지지와 찬사로 널리 알려 졌다고 한다. 영국과 미국에서 살아갔던 네 명의 이민자들의 삶을 담고 있다. 그냥 삶을 담고 있다고 해서는 안될 것 같다. 이민자들의 과거를 그린다고 하면 의례 생각날 법한 과장도 애수 어린 회상도 없다. 모두 불행한 결말을 맞이한 사람들이었으며 몸 어딘가에 커다란 구멍을 안고 살아간 사람들이었다. 그 구멍의 시초에는 1940년대의 독일과 유럽이 있다. 그들 중 다수는 유태인이었지만 2차 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여러 소설들이 그러듯 수용소의 끔찍한 생활은 거의 묘사되지 않는다. 오히려 자세히 묘사되지 않은 그 시절들에서 비롯된 상처, 구멍, 고통의 삶이 작품 속 화자를 통해 전달되고 있다.
작품 속 화자는 '나'이고, 작가 본인과 대체로 유사한 나이, 지역적 배경, 사용 언어 등이 그렇다. 소설 곳곳에는 등장 인물들의 이야기에 어울리는 사진이 실려 있다. 한 인물이 어린 시절 마을 이야기를 하면 그 동네의 커다란 나무를 담은 흑백 사진이 책에 실려 있는 식이다. 심지어 인물 사진도 등장한다. 소설이니 만큼 우리는 이 사진이 이 인물이 실제했음을 드러내는 증거라고 생각할 필요는 전혀 없다. 다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옮긴이가 말하듯 사진 속 이 소년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옮긴이는 제발트의 소설이 한국에서 처음 번역되기에 조심스럽고 걱정도 된다고 했다. 그의 소설은 쾅 하고 섬찟하게 훌륭하다. '이후'의 삶에 대한 훌륭한 기록.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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