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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에 '읽고싶은 책' 목록에 올려놓은 책. 메모에는 알라딘MD의 블로그에서 소개받았다고 적어 놓았다. 문화인류학의 고전으로 자리 잡은 책이라고 한다.
책의 원제는 <People of the Deer>, 1951년에 출판되었다. 저자는 2차대전에 참전한 뒤 1946년 경 캐나다 북쪽 평원을 탐험하러 나선다. 아래는 첫 탐험길에 사슴 무리를 목격하고 감동 받은 대목이다.
책의 원제는 <People of the Deer>, 1951년에 출판되었다. 저자는 2차대전에 참전한 뒤 1946년 경 캐나다 북쪽 평원을 탐험하러 나선다. 아래는 첫 탐험길에 사슴 무리를 목격하고 감동 받은 대목이다.
그리고 나는 서서히 위대한 무관심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다. 삶, 나의 삶과 프란츠의 삶, 내가 알고 있는 모든 살아 있는 것들의 삶이 무의미하게 보였다. 왜냐하면 바로 이곳에 모든 이해를 초월하는 엄청난 크기의 삶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광경은 내 사고를 마비시켜 마치 생명 없이 죽어 있는 이 땅이 신성하고 소중한 생명의 거침없는 풍부함으로 충만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바람강 강둑에서 죽임을 당한 열두 마리의 사슴을 생각하니 더 이상 어떤 공포나 역겨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92~93쪽
백인의 언어로 '배런스'라고 불리는 이 지역은 캐나다 북서쪽에 자리하고 있다. 저자의 말로는 19세기까지 두세 명의 용감한 탐험가를 제외하고는 백인의 발길이 닿지 않은 땅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20세기 들어 북미와 유럽 시장에서 흰여우모피의 수요가 급증하기 시작한다. 탐험가들의 오랜 전언에 주목한 백인들은 배런스 최남단에 교역소를 설립한다. 북서쪽 내륙 깊숙한 곳에 살고 있다고 알려진 이드텐 엘딜리 인디언('사슴을 먹는 자들' - 이누이트의 다른 이름. '이할미우트'는 이누이트의 여러 부족 중 하나)과 접촉한 백인들은 그들에게 총을 줬다. 처음에는 탄약 소비가 적은(그러므로 수익도 적은) 단발총, 나중엔 연발총을 줬다. 밀가루와 라드(돼지기름)도 함께 주었다. 그리고 사슴 혀와 흰여우모피를 받아갔다. 오직 사슴을 먹고 사슴으로 입고 사슴을 따라 살아가던 사람들은 밀가루와 돼지기름을 먹기 시작했다. 식량을 사기 위해 사슴 혀를 모아야 했고 수천 발의 탄약으로 사슴을 죽였고 탄약을 사기 위해 또 사슴을 죽였다. 배런스 전역에서 사슴의 숫자는 급격히 감소하였다. 그렇게 한 세대가 지나고 2차대전이 발발하여 교역소가 철수했을 때,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사슴 혀와 흰여우모피를 들고 교역소를 찾은 그들이 텅 빈 오두막을 발견했을 때, 탄약을 구할 수 없게 되었을 때(지금껏 단 한 번도 일어나지 않았던 일!), 밀가루와 라드를 얻지 못했을 때. 이미 사슴의 숫자는 급감했고 활과 창으로 사슴을 사냥할 수 있는 훌륭한 사슴 사냥꾼의 숫자 역시 줄어든 상태였다. 총으로 사슴을 쏘아 죽이고 흰여우를 잡는 사냥꾼은 많이 생겼지만 말이다. 기아와 굶주림, 면역력의 약화로 인한 질병의 창궐. 19세기 후반 소수의 백인들이 가져온 전염병(이누이트가 '격심한 고통'이라 부르는)이 많은 원주민의 목숨을 앗아 갔었고, 그들이 가져온 또 다른 전염병(총과 탄약 - 자본주의!)은 다시 원주민 부족을 강타했다.
여기까지가 대략적인 역사다. 이할미우트 부족은 그나마 다행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 역시 활과 창을 버리고 총을 썼지만, 여전히 사슴 고기를 식량으로 삼고 있었기 때문이다. 1886년 칠천여 명에 달했던 그들 부족은 1946년 당시 40여명으로 줄어 있었다.
저자는 그 땅에서 2년동안 머무른다. 10가구가 채 되지 않는, 마지막 남은 이누이트 중 하나인 이할미우트 부족과 함께 지낸다. 저자는 냉철한 눈과 애정 어린 마음으로 그들의 일상과 영적인 믿음, 지난 시절에 대한 기억을 기록한다. 여름에는 피를 빠는 파리와 모기가 들끓고 1년 내내 추위기 가시지 않는 땅에서 현지인의 언어를 익히기까지 한 저자의 치열함은 존경스럽다. 작품은 사유 재산에 대한 이누이트의 관념, 놀이와 축제를 통해 서로 다른 부족이 교류하는 방식을 훌륭히 묘사하고 있다.
놀라운 점은 이 책이 나온 시기가 1951년이라는 점이다. 저자가 목격한 현실은 진행형이었고, 그는 단지 연구와 기록에만 전념하려 하지 않았다. 이할미우트 부족의 절멸을 원하지 않았기에 거의 즉각적으로 책을 출판한 것이다.
한번은 또, 아이들에 대해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이할미우트 아이들은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절대로 체벌을 받지 않는다는 사실에 내가 놀라움을 나타냈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무심코 말한 것이었지만, 아이들을 결코 때려서는 안 되는 이유를 내가 모른다는 사실에 정말로 곤혹스러워하는 듯 그는 격렬하게 응수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의 피를 지닌 생명에게 손을 들어 올릴 수가 있습니까?" 라고 그가 내게 물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어른의 힘을 가지고 연약한 아이를 때릴 정도로 비열해질 수가 있습니까? 나는 결코 미치지 않았고 호우미크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모욕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었기에 나는 다시는 그 질문을 들추지 않았다. 206쪽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자신의 피를 지닌 생명에게 손을 들어 올릴 수가 있습니까?" 라고 그가 내게 물었다. "미치광이가 아니고서는 누가 어른의 힘을 가지고 연약한 아이를 때릴 정도로 비열해질 수가 있습니까? 나는 결코 미치지 않았고 호우미크도 역시 그렇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그의 목소리에는 모욕적인 무언가가 담겨 있었기에 나는 다시는 그 질문을 들추지 않았다. 206쪽
선교사의 열렬한 지도를 받으며 일주일을 보낸 해안에 사는 한 에스키모가 우리의 종교에 대해 말한 내용을 소개한다. 곤혹스러웠을지도 모르지만, 그가 솔직하게 원주민들에 대해 연민을 느끼고 있는 지적인 지역 교역 상인에게 털어놓은 이야기다.
"당신들은 정말 엄청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칼루아가 몇 시간동안 당신들이 믿고 있는, 당신의 하느님, 날개가 달린 악마, 하늘과 땅에 살고 있는 귀신과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나는 놀랍고 두렵습니다. 당신들의 믿음 때문에 생격난 이 모든 두려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백인인데다 위대한 힘과 재산을 선물로 받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신들이 가진 법은 그들의 백성의 마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당신들을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죽음이라는 끔찍한 잣대로 당신을 판단하는 이 악마들과 영혼들, 이것들 때문에 나는 공포로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비록 두렵긴 하지만, 이러한 그림자 속에 살아야만 하는 당신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도 태초의 어머니의 아들들이자 이누이트의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옥이라 부르는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부디 잘 싸우기를 바랍니다!" 367~368쪽
"당신들은 정말 엄청난 삶을 살고 있습니다! 목사님 이칼루아가 몇 시간동안 당신들이 믿고 있는, 당신의 하느님, 날개가 달린 악마, 하늘과 땅에 살고 있는 귀신과 영혼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습니다. 참으로 나는 놀랍고 두렵습니다. 당신들의 믿음 때문에 생격난 이 모든 두려움에서도 살아남을 수 있는 유일한 이유는 당신이 백인인데다 위대한 힘과 재산을 선물로 받았음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의 신들이 가진 법은 그들의 백성의 마음에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습니다. 당신들을 하는 모든 일을 지켜보고 죽음이라는 끔찍한 잣대로 당신을 판단하는 이 악마들과 영혼들, 이것들 때문에 나는 공포로 벌벌 떨게 됩니다! 그러나 내게는 이것이 비록 두렵긴 하지만, 이러한 그림자 속에 살아야만 하는 당신들을 생각하니 마음이 안쓰럽습니다. 왜냐하면 당신들도 태초의 어머니의 아들들이자 이누이트의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지옥이라 부르는 곳에서 탈출하기 위해 부디 잘 싸우기를 바랍니다!" 367~368쪽
사실 초반부까지는 별 흥미가 없었다. 내겐 너무 생소한 땅이었기 때문이다. 본문에 앞서 지도가 실려 있긴 하지만 매우 불편하다. 지도만 보면 대충 캐나다 북부라는 사실만 짐작할 수 있을 뿐 알래스카와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작품 속 강과 호수 이름은 그냥 건너뛸 수밖에 없었다. 사슴의 이동 경로를 설명한 대목에선 앞뒤가 맞지 않기도 했다. 중반부 들어 도저히 참지 못하고 세계 지도를 펼쳐본 다음에야 어디 쯤인지 대강 알 수 있었다. 친절한 지도를 곁들여 주었더라면, 번역에 조금 더 신경 써주었더라면 일찌감치 몰입하여 구체적인 정보를 염두에 두고 읽을 수 있었을 것이다.
책에서 가장 압권인 대목은 이할미우트 부족 샤먼 '카쿠미'의 등장이다. 카쿠미의 아버지 세대에 이할미우트 부족은 백인들과 처음 접촉했다. 총과 식량, 온갖 상품들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어릴 적 그 물건들을 목격한 카쿠미의 마음속에서는 '탐욕'이라는 드문 감정이 자라난다. 샤먼 집안의 아들들인 카쿠트와 카쿠미 형제가 자신의 수호자 '토른라크'를 찾아나서는 이야기는 매우 흥미롭다. 비현실적이고 환상적인 이야기이지만, 그의 마음에 존재하는 악마의 정체를 직관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도와준다.
카쿠미는 이할미우트 부족의 오랜 역사 속에서 태어난 돌연변이 같은 존재다. 같은 부족민이 가지고 있는 탄약을 빼앗아 그들을 굶어죽게 만들고 자신의 텐트에 오래 된 물건을 보관해 놓는다. 다른 부족민들은 카쿠미를 두려워하고 멀리 한다. 카쿠미의 악마성에 치를 떨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곧이어 우리는 충격적인 깨달음을 얻게 된다.
"여긴 내 부족이 있는 곳이오, 백인 양반! 인간의 강가로 내려갔을 때 우리 부족 사람들을 보지 못했소? 평원에 솟아 있는 산들만큼이나 많은 죽은 사람들의 무덤이 사방팔방에 있는 걸 보지 못했소? 자신들이 어떻게 죽었는지 말하는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봤소, 그 목소리를 들어 봤소?
그 유령들은 이 세상의 온갖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더 많은 것을 탐내 우리의 목숨인 사슴도 가져가고서는 우리에게는 가슴에 격심한 고통만 안긴 채 죽게 내버려둔 카블루나이트, 백인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오!
당신들은 부자요! 당신들은 아주 부자요, 백인 양반! 차와 총과 탄피에서는 우리 부족보다 더 부자요. 그러나 우리도 부자요! 무덤과 유령에서는 우리가 더 부자요. 이것이 당신들의 소행이오." (...) 나는 그 늙은 남자 자신은 결코 알지 못할 사실, 그를 조종한 악마의 교활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해하고서 텐트를 떠났다. 백인들의 선물이었던 해악들은 이할미우트 부족의 한 남자의 몸과 마음에 깃들어 그 땅과 부족 사람들에게 온 것이었다. 301쪽
그 유령들은 이 세상의 온갖 것을 가지고 있는데도 더 많은 것을 탐내 우리의 목숨인 사슴도 가져가고서는 우리에게는 가슴에 격심한 고통만 안긴 채 죽게 내버려둔 카블루나이트, 백인들에 대해 많은 것을 말한다오!
당신들은 부자요! 당신들은 아주 부자요, 백인 양반! 차와 총과 탄피에서는 우리 부족보다 더 부자요. 그러나 우리도 부자요! 무덤과 유령에서는 우리가 더 부자요. 이것이 당신들의 소행이오." (...) 나는 그 늙은 남자 자신은 결코 알지 못할 사실, 그를 조종한 악마의 교활함이 어느 정도인지를 이해하고서 텐트를 떠났다. 백인들의 선물이었던 해악들은 이할미우트 부족의 한 남자의 몸과 마음에 깃들어 그 땅과 부족 사람들에게 온 것이었다. 301쪽
서평을 쓰다 보니 절감한다. 이누이트가 겪은 고통의 유래를 요약해 쓰기 위해 몇 번이나 관련 부분을 다시 읽었다. 대충 읽은 탓이다. 그리고 이할미우트 부족의 각종 설화와 신화, 민담, 샤먼 카쿠미에 관한 이야기가 담고 있는 깊고 흥미로운 의미를 바라는 만큼 풀어내지 못했다.
이할미우트 부족의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슬프지만, 회의적인 생각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팔리 모왓은 그가 최선을 다해 내놓은 보고서와 책을 통해 이할미우트 부족이 스스로 살아남을 수 있는 대안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주장에 당시 캐나다 정부가 온전히 귀를 기울였을까? 차라리 그들 전부를 도시로 이송하여 가두어 놓고 공장 노동에 익숙해지도록 만들려 했을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만약 그랬다면 그 시도는 실패했을 게 틀림없다. 기회가 닿는 대로 자료를 찾아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