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도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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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커트 보네거트 (아이필드,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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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아래 홍보문구가 거슬린다. 끙.

많은 사람들이 무라카미 하루키로 인해 커트 보네거트와 레이몬드 카버를 알게 된 모양이다. 나는 하루키의 말을 들은 적이 없다. 보네거트는 우연한 계기로 그의 마지막 산문집 '나라 없는 사람'을 읽고 반했다. 카버는 그의 단편을 연극으로 접한 뒤 관심을 가져서 내일이면 그의 단편집이 도착한다. 그냥 그렇다는 거다.

'제5도살장'은 2차 대전 중에 일어난 최대의 학살이었던 '드레스덴 폭격'을 다루고자 했던 소설이다. 연합군의 폭격으로 13만명의 인간과 16세기 이래로 아름다운 건축물과 같았던 도시가 지구 상에서 사라졌다. 미국의 히로시마 폭격으로 사망한 사람이 7만명이다. '드레스덴 폭격'은 최단 시간의 인류 최대의 학살 사건인 셈이다. 작가 본인이 폭격 당시의 드레스덴에 포로로 생존해 있었고, 당시 그가 있던 포로 숙소가 돼지를 도살하던 도살장 제5호 였다.

다루고자 '했던'이라는 표현이 이 소설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실제로 드레스덴 폭격 당시의 풍경을 다룬 부분은 얼마 되지 않는다. 작가는 전쟁을 겪고 난 뒤 자신이 겪은 이 사건을 쓸려고 오랜 시간동안 노력했지만, 막상 쓸 게 별로 없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소설은 기묘하다. 구성도 특이하다.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는 아니다. 딱 내 수준이다. 또한 작가의 특기라 할 수 있는 유머, 특히 블랙 유머가 곳곳에 숨어 있다. 주인공 빌리 필그림은 작가의 분신이라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그는 '시간 여행'을 할 줄 안다. 전쟁 전에 처음으로 경험한 이 '시간 여행'을 통해 그는 자신의 생애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있다. 그런 이상한 사람이 주인공이다.

이 소설에서 중요한 부분은 '트랄파마도어 인'들이다. 그들은 외계인이다. 그들은 시간을 과거-현재-미래로 구분하지 않는다. 모든 시간을 직관할 줄 알고, 그래서 자신들의 미래와 종족의 멸망까지 모두 알고 있다. 그들과 빌리의 대화는 의미심장하다. 트랄파마도어 인들이 보기에 인간은 '꽁꽁 묶인 채로 자리에 앉아 강철구체를 뒤집어 쓴 채, 아주 작고 긴 원통의 파이프를 통해서만 본다'. 인간들의 시야는 좁다. 빌리는 트랄파마도어 인들에게 그들처럼 인간이 평화롭게 지낼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고 묻는다. 그들의 대답은, 과거-현재-미래의 모든 순간은 그렇게 되도록 구조지어져 있는 것이므로 전쟁도 우주의 멸망도 바꿀 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 지구인들에게 끔찍한 순간은 외면하고 좋은 순간에만 집중하며 살아가는 게 가장 좋다고 말한다.

보네거트는 인류의 희망과 미래에 회의적이었을 것이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의 마지막 산문집에서 말하듯, 너무 그리고 아주 오랫동안 슬퍼하다보면 더 이상 유머가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냉소주의자가 되지 않았고, 거의 모든 소설에서 유머와 헤어지지 않았다. 2007년에 사망하기 전까지 노구의 몸으로 부시의 침략 전쟁을 반대하며 피켓을 들고 집회에 참가했다고 한다. 심지어 자신은 '나라(조국) 없는 사람'이라고까지 말하면서 말이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나는 조국이 없다(잃었다)'고 말하는 게 절대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1966년에 출판됐다.1968년 한창 미국이 베트남 전쟁에 열심이었고 미국과 유럽에서 68혁명이 일어났을 때 미국의 많은 청년들이 이 책을 읽었다고 한다. 보통의 소설과는 전혀 다른 구성으로 쓰여진 이 소설이 당시의 청년들에게 분명 매력적이었을 것이다. 보네거트를 표현할 때 흔히 '포스트모던'한 소설들을 많이 썼다고들 하니까.

더불어 이 소설에만 특이한 감상이 하나 있는데, 역자가 무척 마음에 든다. 박웅희씨. 그는 같은 출판사 아이필드 에서 보네거트의 소설을 3권 번역했다. 읽는데 무리 없는 번역이었고, 결정적으로 책 뒤에 실려 있는 '역자의 말'이 무척 훌륭했다. 역자의 해석에 깊이 공감했고, 개인적인 감상도 매우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그가 번역한 나머지 두 권의 소설도 읽어볼 생각이다.

마지막으로, 보네거트 짱이다! ㅎㅎ

 한 번은 로즈워터가 빌리에게 과학소설이 아닌 어떤 책에 대해 흥미로운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은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젠 그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네." 로즈워터가 말했다.

* * *

또 한번은 로즈워터가 정신과 의사에게 이렇게 말하는 것을 빌리는 들었다.

"당신네 정신과 의사들은 아주 그럴듯한 새 거짓말을 많이 만들어내야 할 것이오. 그러지 않으면 사람들이 더 살고 싶어 하지 않을 테니까." (122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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