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이고인다김애란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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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애란 (문학과지성사, 20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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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읽는다, 김애란의 두번째 책!  

도도한 생활
침이 고인다
성탄특선
자오선을 지날 때
칼자국
기도
네모난 자리들
플라이데이터리코더

지금 김애란씨의 목소리를 듣는 중이다. ㅎㅎㅎ작가는 사이버문학광장 http://www.munjang.or.kr/ 에서 라디오 코너를 진행하고 있다. 그 이전 진행자는 이기호씨라고 한다. 그나마 내가 이름이 익은 사람이 이기호씨와 김곰치씨다. 시인도 소설가도 여럿 모셔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이름 익숙한 사람이 드물다.

근데 정말 이 사람 작품 좋다. 고마워요, 김애란 작가님 고마워요, 그렇게 말하고 싶다. 우리네 구질구질한 삶을, 우리 자신조차 구질구질함을 느끼지 못하는 우리 삶을 솔직하게 말해줘서 고마워요. 그렇게 말해주고 싶다.

침이 고인다, 는 2007 이효석문학상 수상 작품집에서 이미 읽었다. 그래도 다시 읽었다. 그래도 좋다. 작가는 나이브하지 않다. 우리랑 별로 다르지 않게 살아왔다. 그걸 솔직하게 그리고 재밌게, 작품으로 만들어내는 재주까지 갖췄다. 이 단편은 학원 강사를 하는 20대 후반의 여성이 어느 날 집으로 불쑥 찾아온 후배와 3달 정도 살게 되고, 직장인 학원에 나가고, 결국 후배와 헤어지기까지를 담고 있다. 이게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 나도 자취하면서 2명 혹은 3명 같이 살아본 적이 많다. 한 2년은 그렇게 살았던 것 같다.

그녀는 누군가와 함께 살아 좋은 순간은 뭔가 같이 '먹을 때'라는 걸 깨달았다. 밥상 앞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스로 보통 사람이 되는 것 같았고, 그 상이 그냥 상이 아니라 아주 오래전부터 내려오는 유구한 밥상처럼 느껴졌다. (침이 고인다, 66쪽)

자취생활 3년. 이런 걸 느낀 건 한 1년 반 쯤 지났을 때? 혼자 밥 먹는 거 진짜 재미없다. 돈 없어서 밖에서 사먹지는 못하겠고. 쌀이랑 반찬은 어머니가 마련해 주셨으니까 굶진 않아도 된다. 얼마 전 TV가 생겨서 그나마 잡생각 없이 밥 먹을 수 있었지, 그 전엔 컴퓨터에 버라이어티쇼든 드라마든 뭐든 꼭 하나는 틀어놓고 밥을 먹어야 했다.

경제적 독립이 주는 떳떳함과 함께 술자리에서 초조해하지 않아도 된다거나, 지인들의 경조사에서 사람 노릇 할 수 있다는 것 역시 그녀가 학원을 그만두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아울러 '그만둘까' 하는 마음이 들 때마다, 월급날은 번번이 용서를 비는 애인처럼 돌아왔다. (침이 고인다, 50쪽)

그녀는 문득, 자신이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순간은 바로 이런 때가 아닐까 생각한다. 수도 요금을 지불할 수 있다는 것, 샤워기 아래서 그것을 아주 사실적이고 감각적으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최고급은 아니더라도 보통보다 약간 좋은 목욕 용품으로 샤워를 하며, 쾌적함과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에 대해 두려움 비슷한 안도감을 느낄 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자신이 선택하고 있다고 믿을 수 있을 때 말이다. (침이 고인다, 77쪽)

아... 정말 공감이 간다. 눈물날 정도로.

나는 다 왔다고 한다. 언니가 일러준 대로 역 앞 정류장에서 5515번을 탄다. 버스 안에는 사람이 별로 없다. 대부분 젊은 사람들인데, 왠지 모르게 그들 모두가 서울대학교 학생처럼 느껴진다. 존경하면 안 되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 존경심이 일어난다. (기도, 194쪽)

내 삶과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더 재밌었는데. 지하철과 신림이 주요한 배경으로 등장하는 '기도'는 특히 더 그랬다. 올해 들어 서울대 갈 일이 많아서 자주 다닌다. 나도 5515 타본 적 있고, 작가와 똑같은 생각을 버스에 타는 또래들을 보면서 한 적이 있다. 언젠가 신림동 같은 곳을 배경으로 소설을 써보면 어떨까, 그렇게 생각한 적이 있어서 왠지 아쉽기도 했고. 고시원, 은 이미 박민규시의 '갑을고시원 체류기'가 잘 다룬 소재이지만 김애란씨는 그 나름대로 재밌게 그려낸다.

그때 내게 유일한 즐거움이 있었다면 하루 두 번 한강을 볼 수 있다는 거였다. 의자에 기대 있거나 내가 가질 수 없는 얼굴을 한, 60년대 한국 작가들의 글을 보며 가슴을 쓸어내리다가도, 열차가 전속력을 다해 한강을 지나는 찰나, 창문 안으로 20세기 풍경이 박살 난 채 쏟아지는 순간이 올 때면 재빨리 몸을 틀어 창밖을 내다보곤 했다. (네모난 자리들, 223쪽)

2006년부터 2007년 초까지는 일주일에 세 번, 요즘은 일주일에 한 두번, 3호선 을 오르락 내리락 했는데 옥수 랑 압구정 사이 한강만 지나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책 읽느라 정신없던 몇 번 빼고. 몇 몇 사람들도 그렇게 한강을 봤지만 대부분은 무관심한 표정이었다. 아마 내가 지방 출신이어서 그런가보다. 서울이 고향인 사람들에게 한강은, 내게 대구의 '신천'과 비슷한 느낌일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한강이 크고 아름답다.  

'자오선을 지날 때' 소재가 참 신선했다. 요즘 애들 재수 참 많이 한다. 신입생 때도 그렇고, 그 이후로 후배들과 학기 초에 어울릴 때마다, 자기 소개하다가 재수했다 그러면 "재수 어디서 했어?" 꼭 물어보더라. 그러다 자기랑 같은 학원이라도 다녔다 싶으면 마치 지방에서 올라온 애들이 동향 친구를 발견한 것처럼 서로 반가워 한다. 특히 서울에서 나고 자란 애들한테는 '같은 재수 학원'이 '동향'과 비슷한 느낌의 유대감을 만들어주는 것처럼 보였다. 근데 가끔 서울에서 재수한 지방 애들이 있다. 얘들은 대부분 고시원 같은 곳에서 살았다고 들었던 것 같은데, 나로서는 정말이지 상상도 못할 일상을 살아왔을 것이다. 나는 죽어도 재수는 안 한다고 생각하고 어떻게든 점수 맞춰서 서울 올라와서 일단 재수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해를 못하겠다. 그 죽도록 괴로운 시간을, 정말 죽고 싶은 시간을 1년이나 더 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을까? 성탄특선, 은 나는 전혀 알 수 없는 '모텔'의 세계를 다뤄서 마치 새로운 어른의 세계를 배우는 기분이었다.

그리고 문체도 모난 구석 없이 마음에 든다. 건조하게 우리 삶을 그리지만 시크한 것은 아니다. 애정이 있다. 그렇다고 해서 '힘들어도 괜찮아' 식의 위로를 하는 건 아니다. 그냥, 동시대의 우리 또래의 삶을 '그래, 너도 그랬구나' 하고 말해주는 것 같은 묘한 안도감.

어느 인터뷰 기사에서 읽었는데 그녀 나름대로 사회에 대한 문제 의식도 갖추려 하는 작가. 다음 작품으로는 택시 기사를 다루는 장편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기대된다.

나는 '재수'나 '전학'이라는 말과 달리 '편입'이란 말은 묘한 빈곤감을 준다고 생각했다. 언니는 "세상에 영어 하나만 돼도 주어지는 기회가 얼마나 많은 줄 아느냐"며 훈수를 뒀다. 나는 언니가 '영어 하나만 돼도 주어지는 기회가 많다'는 걸, 어째서 20대 초반이 다 지나서야 깨달은 것일까 의아했다. 언니는 문제집을 잔뜩 안고 와, 단어를 외우고 테이프를 청취했다. 내가 미친 듯이 타이핑을 하는 동안, 언니는 피아노 위에 문법책을 펼쳐놓고 외국어를 웅얼거렸다. ... 어느 날 언니는 도저히 이해가 안 된다는 듯 볼펜을 집어던지며 소리쳤다.
"야, '미래'가 어떻게 '완료'되냐?"
나는 지층 단면도를 따다 붙이다 말고, 키보드에 머리를 박으며 외쳤다.
"아! 과학이 제일 싫어!" (도도한 생활, 31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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