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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곰치 (녹색평론사, 20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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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포란, '어떤 현장을 긴 시간을 두고 스케치한 글' 이라고 이해하고 있다. 단기간의 사건을 중심으로 약간의 맥락을 곁들여 설명하는 것이 기사라면 르포는 호흡이 길고 글쓴이가 조금 더 드러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어쩔 수 없이 르포에도 유통기한이 있다. 이 책의 네 편의 르포도 마찬가지이다. '기억을 향한 투쟁 - 폐광촌 카지노에서' '생명의 대안은 없다 - 북한산국립공원 관통도로 공사현장에서' '새만금에 망가지는 삶과 꿈 - 부안에서 보낸 5일' '새만금예수님을 죽이지 마라 - 부안에서 보낸 12일'.이 르포들이 기록한 현장들은 모두 패배하고 말았다. 북한산도 그럴 것이고, 새만금 갯벌도, 강원도 탄광촌들도, 천성산도 모두 다. 그렇지만 작가는 이 책에서 자신이 가장 중요하다 생각하는 것은 앞의 네 편의 르포라고 말한다. 이 르포들을 쓰면서 그는 자신이 작가임을 느꼈다고 했다.

문학이 좋은 것은 그래서다. 어쨌든 모든 인간의 마음에 닿을 수 있는 보편성을 향한 것이어서 시간이 오래 지나도 읽는 의미가 있다.

그러니 결국 사북사태는 사람과 사이 사건의 차원을 넘어선다. 이 땅 위에, 저 푸른 하늘 아래, 이 맑은 바람 속에서 물과 공기를 마시며 사는 람이란 존재가 자신에게 주어진 생명의 가능성을 실현하면서 산다는 것은 대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 그 가장 근본적인 것을 질문하게 만드는, 모든 잡념과 허위의식을 일거에 빨아들이고 오직 그 본질적인 질문만 남기는 블랙홀 같은 '사태'다. (35쪽)

정말 어떤 것일까. 모든 사람이 바람과 풀과 바다와 산을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 그런 심성이 깃들어 있을까? 착한 사람이 많은 세상이지만 나쁜 사람 역시 적지 않은 세상이지 않은가? 지독하게 무식한 인간들도 많고 지독하게 잔인한 인간들도 많지 않은가?

아니 분명히 천성산이 뚫려 나가는데도 스님이 산다면 천성산이 살아있는 것이라니. 다시 외칩니다. 왜 그러냐! 천성산과 스님이 한몸이기 때문입니다. 그걸 제가 믿기 때문입니다! 스님만 살릴 수 있다면, 제게는 천성산이 사는 것과 똑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러냐! 다시 진실을 외칩니다. 스님이 천성산이기 때문입니다. 제가 그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이 저의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이미 벌어졌기에 이제 누구도 거꾸러뜨리지 못합니다. 하여 저는 결심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는 스님만 바라보겠다. 스님만 바라보겠다! (146쪽)

거의 모든 글이나 문학이 솔직한 마음으로 쓰여진 것이겠지만 나는 이처럼 솔직한 글을 본 적이 없다. 작가의 외침과 호흡이 진짜로 생생하게 들려오는 것 같다. 자주 등장하는 느낌표는 과장된 표출이 아니라 내 가슴을 꽝꽝 때리는 외침으로 들린다.

소설은 힘이 얼마나 셀까. 한사람의 인생을 바꿔놓을 수 있는가. 종교적인 계시가 엄습하듯 영혼을 휘어잡을 수 있는가. 소설을 통과한 뒤의 그/녀는 소설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살게 되는가. 소설에 그런 대단한 힘이 있는가. 소설의 그런 힘을 믿기에 나는 지금껏 소설을 쓰려고 한 것 아니었는가.

나 자신에게 묻는다. 지금껏 읽은 소설 중 그런 소설이 있었냐고. 답은 '없다'이다. 몇 대목이 나를 압도한 적은 있어도 그게 소설만의 힘인지, 주관적인 예술의 정열이나 개인적인 사연에 의한 것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 허구적이면서도 철저히 자기 이야기인 소설, 타인에 대한 말걸기 방식의 최대 발명품이라는 맹신과 함께 냉소도 만만치 않았다. 이딴 지루한 걸 누가 읽어!

완벽한 파괴력을 가진 기존 소설을 경험했다면 나까지 소설을 쓰려고 덤비진 않았을 것이다. 천부적인 작품, 완벽한 재능 앞에 '내가 어떻게 이런 걸...' 하며 작가가 될 엄두도 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그 어떤 작가에게도 진정한 독자이지 못했다.

소설의 힘은 체험한 건 사실 내가 소설을 쓰면서다. (261쪽)

정말 그렇다는 사실을 아주 조금 깨달은 게 최근이다. 얼마 전부터 '나도 단편 소설이라도 하나 써보면 어떨까...' 싶은 생각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내 어린 시절 이야기라든가, 가족 같은, 가장 잘 알고 무엇보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 것에 대해서라면 못 쓸 것도 없겠다 싶었다. 어쨌든 그렇게 잠재적으로 '나도 글을 써보자!'라는 생각을 하고 나니 소설 읽는 게 예전과는 조금 다르다. 그냥 자연스럽게 이야기의 흐름을 따라가기만 하는 게 아니라 자연스럽게 보여도 이 대목에서 이런 인물이 등장하고, 이런 말을 하고, 이런 사건이 등장시키고, 이 모든 걸 글로 쓴다는 게 참 쉽지 않은 일이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그러고나니 외국 문학보다는 한국 문학에 더 관심이 생기기도 하고. 나와 같은 언어로 자신의 생각을 써내는 사람들이니까. 그 입장이 아주 조금 이해가 되는 것이다.

이 책에서 가장 감동적인 글은 '동구의 나무'라는 단편 소설이다. 아마도 작가의 자전적인 경험이 강하게 반영된 게 아닐까 싶다. 정말 정말 너무 너무 마음에 드는 단편이다.

작가처럼 생명과 생태주의의 세계로 온전히 들어가는 것은 힘들었지만 공감하는 부분이 많았다. 김곰치라는 작가가 참 따뜻하고 여린 사람이구나, 그리고 날카로운 사람이구나, 지저분한 현실의 구덩이에 직접 들어가보려고 하는 훌륭한 작가구나.

르포, 산문, 단편, 꽁트까지 섞인 구성이 조금 잡다한 책이지만 읽어볼만한 책이다. 표지도 무척 예쁘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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