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두 단락으로 이루어진" 소설이다. '옮긴이의 말'을 먼저 읽는 이들에게는 (그리고 이 글을 읽는 이들에게) 그러지 말라고 충고해주고 싶다. 두 가지 이유. 마지막의 한 단락을 보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옮긴이의 어렵지 않은 감상에 독서가 방해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소설을 요약하자면 어렵지 않다. 피노체트 정권을 겪은 한 늙은 사제이자 문학비평가의 자서전. 문학을 곁에 두고 평생을 살아온 이 주인공은 "언행뿐만 아니라 침묵까지도 책임지겠다는" 각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 다 읽고 나자 혼란스러웠다.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의 삶이 잘못되었다는 걸 자각하고 있는데 끝끝내 입 밖으로 꺼내지 않는다. 잘못했다, 미안했다,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같은. 그는 회고의 끝에 가서야 겨우 고백한다. "혼자서는 역사에 대항하기 힘들다. 늙다리 청년은 늘 혼자였고, 나는 늘 역사와 함께했다." 154쪽 이것이 그의 회고 전체에서 발견한 최고의 반성이다. 그러나 사죄하며 용서를 구하지는 않는다. 여전히 처음의 각오가 무색하다. 이 회고의 정체를 무어라 불러야 할지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헤매다 애초 책을 추천해준 정혜윤씨의 글을 다시 읽게 되었다. 맞아, 바로 이거야. '변명'. '죽기 전날 밤의 변명'


"어느 날 오후 유다의 나무, 유다의 나무를 흥얼거리면서 가다가 칠레 전체가 유다의 나무로 변해 버렸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잎이 다 떨어져 겉보기에는 죽은 나무 같지만, 지렁이 길이가 40센티미터나 되는 우리의 비옥한 흑토에 아직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있는 나무로." 143쪽


그는 최후의 '지랄 같은 폭풍'을 예상하지 못했을까? 그 정도로 솔직할 수 있었다면 예상 가능한 결말 아니었을까? 잊을 건 잊고 묻을 건 묻었어야지. 애초 그의 회고의 목적은 '"정당화"였다. 그리고 그 결말은 다음과 같다.


(그녀는) 그리고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한다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숙이고 그 집을 떠났다. 산티아고로 차를 몰고 돌아오면서 그녀의 말을 생각했다. 칠레에서는 이렇게 문학을 하지. 하지만 어디 칠레에서만 그런가. 아르헨티나, 멕시코, 과테말라, 우루과이, 스페인, 프랑스, 독일, 푸르른 영국과 즐거운 이탈리아에서도 그런걸. 문학은 이렇게 하는 거라고. 아니 우리가, 시궁창에 처박히기 싫어서,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이렇게들 한다고. 153쪽


안타깝고 초라한 변명. 추한 늙은이의 모습만 남았다.

폭풍 같은 문장들이 압권이다. 어느 한 군데 막힘없이 한 지식인의 삶이 생생하게 펼쳐진다. 한참 쓰다 보니 이제야 조금 정혜윤씨의 감상을 이해할 것 같다. "죽기 전날 밤에 변명하지 않으려면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배웠다는 말. 


2011.2.6.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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