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학카페에서문학읽기<파우스트>에서<당신들의천국>까지철학,세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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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용규 (웅진지식하우스,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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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윤씨의 책을 생각나게 한다. 본문에 삽입되어 있는 일러스트의 느낌이 비슷하고, 책의 성격도 그렇다. 두 책 모두 고전을 읽고 쓴 독후감을 모아 놓았다.
아쉬운 점 두 가지. 첫 번째. 인용된 문구의 출처를 제대로 밝혀놓지 않았다. 원서로 읽어 번역은 직접 했다, 혹은 이 구절은 어느 번역본에서 가져 왔다, 그런 말을 찾아볼 수 없다. 양해의 말도 없다. 이래도 되는 건가?
두 번째. 저자는 존댓말을 사용한다. 해석이란 본래 철저히 주관적인 것이다. 작품을 읽고 생긴 여러 생각거리 중 본인의 마음에 드는 길 하나를 선택하여 떠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말투로 써야 제 자격에 어울린다. 친절해지려 존댓말로 주관적인 해석을 서술할 경우, 마치 자신의 해석이 이 문학에 가능한 단 하나의 옳은 '철학적' 해석일 뿐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왜 이런 식으로 썼을까? 참 마음에 안 들었다.
하긴, 이 책은 카페에서 돈만 주면 손쉽게 사먹을 수 있는 완성된 '커피'를 지향한다. 저자는 '철학'이라는 재료를 첨가한 이 독특한 커피를 독자 여러분이 맛있게 드시길 바란다고 말한다. 그가 만든 완제품 커피를 마셔보는 것도 나름 도움이 될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특히 맨 첫 부분의 <파우스트> 독후감부터 그랬다, 원 저작에 대한 참고 자료로 읽으면 꽤 유용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철학 이론과 철학사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활용하여 고전 작품을 풍성하게 풀어 헤쳐 준다. 독자로서는 날카롭게 응축된 고전을 맞대면하여 곤란하기보다 이런 참고 자료를 활용해서 나쁠 것이 없다.
어떤 사람이 말했다. "이런 책은 평소에 책 잘 안 읽는 사람이 읽지 않나?" 꼭 그렇다고 볼 수는 없겠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읽었을까, 궁금해서 찾아보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수긍이 갔다. <파우스트>나 까뮈와 사르트르의 골치 아픈 작품들을 직접 읽지 않더라도 이 책만 꼼꼼히 읽고 중요한 대목을 기억해 둔다면 적당한 수준에서 대화에 참여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커피에 무엇이 들어갔고 어떤 방식으로 만들었는지는 모르더라도, 한 모금 마셔보고 '음 이건 좀 쓴데?' '고소하다, 향이 좋구나!'라고 한마디 할 수 있듯이 말이다.
저자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기획에 잘못이 있는 것도 아니다. 독자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렸다. 고전은 결론과 핵심 주장만 쏙 빼내기만 하면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플라톤의 <국가>를 읽는 이유가 그의 철학왕 모델을 현실에 적용하기 위해서는 아니듯. 우리가 고전을 읽는 이유, 한 작품이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는 나아가는 과정에서 배울 점이 있기 때문이다. 글의 흐름을 꼼꼼히 기록하며 논리 전개를 놓치지 않고 따라갈 때, 개념어 하나를 허투루 넘기지 않고 그 단어 안에 담긴 놀랍도록 넓은 관념을 이해하게 될 때 비로소 한 작품이 고전이라 불리는 이유와 그 작품에 숨겨진 '빛'을 볼 수 있다. 그 순간이 주는 희열! 쉽사리 잊히지 않는다.
아래는 인상적인 구절들. 저자가 재인용한 원 저작의 구절들을 읽으며 새롭게 감동했다. 마음에 안 드는 구석도 있지만 꽤 잘 쓴, 많이 팔릴 만한 책이라고 생각했다. 

인간은 자신을 인간으로 알아주는 상대 앞에서만 인간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그런 상대가 없는 곳에서는 자신마저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따라서 그런 상대와의 만남만이 진정한 만남이라는 것을, 그렇지 않은 만남은 아예 만남이 아니라는 것을, 외로운 것은 사막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남이 없어서라는 것을, 만남이 없는 모든 장소가 곧 사막이라는 것을, 사막은 도시에도 있다는 것을 그는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어린 왕자>를 썼습니다. 74쪽

2008년 12월 26일의 일기 가 생각났다 : "(...)그들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 도시의 건축물처럼 그냥 그 풍경 속에 녹아있는 장면의 한 부분이나 다름없다. 그 부분을 차지하는 구체적인 인물은 바뀌지만 나는 그것을 인지하지 않고, 그럴 필요성도 느끼지 못한다. 그들 모두 내게는 동물이고 오직 나 혼자만이 인간이다."

"우선 참을성이 아주 많아야 할 거야. 처음에는 나와 거리를 두고 그렇게 풀 위에 앉아 있으면 돼. 내가 곁눈으로 너를 보더라도, 내게 말을 시켜서는 안 돼. 말이란 항상 오해를 낳으니까. 그러나 넌 매일매일 아주 조금씩 나에게 다가와 앉게 될 거야." "네가 오후 네 시에 온다면 나는 세 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시간이 갈수록 난 점점 더 행복해질 거고 네 시에는 흥분해서 안절부절못하게 되겠지. 그건 나의 행복이 얼마나 값진 것인가 보여주는 거야!" 81쪽, <어린 왕자>를 재인용

: 이 구절들을 읽고 나자 나는 정말 <어린 왕자>를 다시 읽고 싶었다. 4년 전 쯤, 그제야 사춘기 절에나 가슴에 와 닿을 법한 동화 같은 작품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약간의 의무감으로 읽어나갔고 큰 감동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어린 왕자를 다시 만나면서 지난 시간 나의 외로움이 힘겹게 버티며 다다른 관계 맺기의 방식과 <어린 왕자>의 그것이 무척 유사하다는 점을 깨닫는다.


"무대장치들이 문득 붕괴되는 일이 있다. 아침에 기상, 전차를 타고 출근, 사무실 혹은 공장에서 보내는 네 시간, 식사, 전차, 네 시간의 노동, 식사, 수면 그리고 똑같은 리듬으로 반복되는 월, 화, 수, 목, 금, 토. 이 행로는 대개의 경우 어렵지 않게 이어져 간다. 다만 어느 날 문득, '왜?'라는 의문이 솟아오르고 놀라움이 동반된 권태의 느낌 속에서 모든 일이 시작된다." 까뮈의 <시지프의 형벌>을 186쪽에서 재인용


 2011.3.1.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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