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치 백혈병 치료약을 독점한 채로 전 세계를 쥐고 흔드는 다국적 기업의 횡포를 보는 것처럼, 파울로 코엘료의 작품들이 번역되는 족족 대형 서점 베스트셀러 서가에 진열되어 있는 모습을 보는 것은, 썩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아니 대체 무슨 책이길래 연금술사, 연금술사 하는거지? 인생과 자아에 대한 달콤한 충고에 귀 기울이는 사람보다는 도스토옢스키의 죄와 벌을 읽은 사람이 나는 좋다', 뭐 그런 불만스러운 생각을 했더랬다. 물론 난 연금술사 라는 책을 읽지 않았다.
그런데 친구가 이 책을 빌려줬다. 내가 요즘 사랑, 사랑 했더니 이 책을 빌려줬다. 확실히, 사랑에 한창 마음 설레어 하는, 봄날 청년에게 이 책은 다른 무엇이기보다 '연애소설'로서 무척 재밌었다. 사랑과 신앙, 뭐 이 두 가지로 이 소설을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겠지만 그보다 의미있는 메세지가 담겨있는 것 같다. 특히 '여성으로서의 신의 면모'라는, 종교적 문제에 대한 부분이 꽤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신선하면서 매력적이었다. 그리고 번역을 잘 한 건지 멋드러진 문장이 많았다. 번역하신 분은 학부와 대학원 과정에서 국문학을 전공하신 분이던데, 번역자 치고 드문 경우인 것 같아서 내막이 조금 궁금하긴 했다.

미지의 것을 두려워하고 안정된 직장과 평범한 결혼생활을 꿈꾸는 여자와 함께 보내는 시간에 그가 어떻게 흥미를 느낄 수 있었겠는가? 어린 시절의 친구들에 관한 잡담이나 보잘것업는 마을에 대한 먼지 같은 기억들을 쉬지 않고 지껄여댄 내가 한심했다. 하지만 내가 나눌 수 있는 대화란 그런 것들뿐이었다. (46쪽)
현실에서의 사랑은 가능성이 있어야 한다. 설사 내가 주는 사랑에 대해 당장 대답을 얻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언젠가는 원하는 사람을 가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이 있어야 존재하는 것이 사랑이다. 그렇지 않은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 (61쪽)
"하지만 내가 무엇을 두려워하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어. 난 더이상의 새로운 두려움을 원치 않아. 지금 갖고 있는 두려움만으로도 충분하니까." (65쪽)

내가 좀 속물적으로만 해석하는건지 모르겠지만, 여자를 사랑하는 남자와 남자를 사랑하길 망설이는 여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그 시공간에서 만들어지는 미묘한 감정과 섣부른 추측과 견디기 힘든 불안과 두려움 같은 걸 잘 묘사하고 있다. 특히 앞 부분에서. 여자가 남자의 신앙을 이해하고 그의 길을 함께 걷겠다고 마음먹고 난 뒤부터는 드물어진다(동시에 재미없어진다. 기분은 좋았지만).
만약 두 달 전이었다면 정말이지 전혀 재미없었을 것 같았다. 이게 다 책을 빌려준 상진이 덕분이고, 한편으로 조르바 덕분이기도 하다. 시궁창 같은 세상에서, 그 모든 책들 따위는 모두 불태워 버리라고, 남자와 여자가 만나 사랑하는 것보다 중요한 게 어딨냐며 타박했던 노친네 덕분이다. 조르바야말로 마초 중의 마초지만, 마초로서 가장 멋있어질 수 있는 데까지 나아간 사람이다. 그 정도면 형으로 모시고 인생의 조언을 듣고싶어질지도 모른다.

" ... 처음에는 이 분 동안 그 사람을 생각하고, 세 시간 동안 잊고 있지. 차츰 그 사람에게 익숙해져서 전적으로 의존하게 되면, 그때는 어떻게 되는지 알아? 세 시간 생각하고 이 분 동안 잊는 거야. 곁에 없으면 마약 중독자처럼 불안해지지. 그래서 중독자들처럼 필요한 약을 얻기 위해 도둑질을 하고 스스로를 굴욕감에 빠지게 만드는 행동을 하게 돼. 사랑을 위해서라면 뭐든 다 하게 되는 거야. ... 그러니까 우리는 곁에 가까이 머물 수 있는 사람만을 사랑해야 해." (99쪽)

하여튼 이런 부분은 참 마음에 와 닿는다. 마치 세속적인 대중가요의 가사를 읽는 것 같기도 하다.

피에트라 강가에서 나는 울었네
카테고리 소설
지은이 파울로 코엘료 (문학동네,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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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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