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별에도예의가필요하다김선주세상이야기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학
지은이 김선주 (한겨레출판사,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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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오피니언>면에는 낯익은 이름이 많다. 진중권, 김규항, 김종철, 박노자 등. 모두 외부 필진이다. 그들에 비하면 기자나 논설위원들의 이름은 생소하다. 그분들이 쓴 글은 상대적으로 재미가 덜하다. 자기 이름 석 자만 걸고 쓰는 게 아니기 때문일 것이다. 조직의 구성원으로서, 자기 글이 차지하는 중앙 일간지 지면 크기만큼의 무게를 감당하고 쓴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쓰고 싶은 글만 쓸 수 없다. 자신이 맡은 전문 분야를 토대로 한국 사회 구성원 다수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문제를 소개하고 그에 대하 합리적인 주장을 펴야 한다. 재미는 적더라도 그 글들은 하나같이 주장이 명쾌하고 문장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다.
작년 여름 김선주씨의 기명 칼럼을 처음 읽었다. 논설위원이니 잘은 모르지만 높은 자리를 거친 사람일 거라 짐작했다. 아마 그때 여타의 글보다 독특한 제목에 이끌려 읽어보았을 것이다. 어느 날 동네 고양이에 대한 글 한 편(‘참치를 찾아서’)을 읽었다. 충격이었다. 신문을 읽으면서 감동받으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 뒤로 그의 글이 실릴 때마다 꼭꼭 씹어 먹듯이 읽는다.
그의 글은 대부분 자신의 일상에서부터 시작한다. ‘참치를 찾아서’도 그렇다. 어느 날 마당에 고양이 한 마리가 자주 눈에 띈다. 아들이 이름을 붙여 주고 먹이를 챙겨 주면서 고양이는 더 자주 마당에 머문다. 그러나 그는 빠르게 번식하는 참치네 식구들을 보고 질겁하여 구청을 통해 중성화 수술을 받게 한다. 새끼들이 잡혀가는 날 참치는 새끼 한 마리만 데리고 사라진다. 새끼들은 돌아와 서촌의 명물이 되었지만 참치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책에는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중반까지 쓴 수백 편의 칼럼 중 고르고 고른 102편의 글이 실려 있다. 두께가 얇아 분량이 얼마 안 되겠거니 싶었는데 380쪽 가까이 된다. 1990년대 중반 신문사에서 중책을 맡았던 시절에 쓴 글은 내용 면에서 오늘날 신문사 내부 필진들의 글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만의 독특함이 풍부히 드러나는 글은 정년퇴임 즈음한 2000년대 들어서 쓴 것들이다. 이때 쓴 글들은 분량이 여유롭고 소재도 무척 다양하다.
그의 문장엔 은근한 스타일이 있다. 언론인의 글에서 문체의 매력을 발견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들 글의 목적이 명확하기 때문이다. ‘~한 것 같다’는 투의 문장도 금물이다. 신문의 기본이 되는 기사는 사실을 담고 있는 명제로만 이루어지거나 적어도 그 비중이 80% 이상은 되어야 할 것이다. 주어와 서술어 등 문장 성분들은 오독의 여지가 가장 적은 방식으로 배치되어야 한다. 그의 글도 예외는 아니다. 아주 약간 다르다. 그런데도, 그의 문장에는 ‘은근한’이라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맛이 있다.
언론인 김선주는 한국 언론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차지한다. 여성 최초로 중앙 일간지 편집장을 맡았고 신문사 내부의 굵직한 자리를 두루 거쳤다. 언론사는 20여년 전만 해도 어떤 조직 못지않게 가부장적이었다. 철저한 비판 정신과 회의하는 태도 역시 존경스럽다. 조선일보 해직 기자 출신, 한겨레 창간 등 언론 민주화의 굵직한 사건에 몸담았던 그라면 지난 정부 쯤엔 한 자리 넉넉히 맡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정작 본인은 동시대를 살았던 동료들과 젊은이들 앞에서 부끄러울 일이 많았고 지금도 여전히 마음에 빚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한다. 그녀는 오늘날 언론인이거나 언론인을 지망하는 청년들이 존경할 수 있는 선배 중의 한 사람이다. 
좋은 칼럼집이다. 글쓰기에서도 배울 점이 많았다. 반평생을 기자로 살았으면서도 글쓰기는 언제나 고통스럽다고 고백하는 그다. 정년퇴직 직후에도 “만약 내가 글쓰기를 진정으로 즐기는 경지에 이르면 나도 글쓰기를 평생의 업으로 삼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 그런데 요리는 자신을 한번도 괴롭히지 않았다며 요리와 글쓰기 사이에서 뒤늦게 고민하는 사람. 글쓰기에 뜻을 두고 산다는 게 어떤 일인지 조금이나마 엿본 것 같다. 겁은 나지만… 내게는 포기하기 힘든 이유가 있으니까. 일단은 계속 써볼 것. 

2011.7.

보통의 가정에서 부모 돈으로 공부하고 무난한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별 탈 없이 사는 여성들은 과거의 나처럼 여성운동 자체를 시답지 않게 여긴다. 그러나 어느 날 갑자기 불행이 찾아들고 가족적 배경이 사라졌을 때 이들은 자신이 처한 상황이 무엇인지 분별을 못한다. 헤쳐나갈 용기도 힘도 없다. 진정으로 사회의 모순을 느끼는 것은 스스로가 차별적인 상황에 처했을 때만이 가능하다. 여성운동도 사회적 편견과 싸우는 목마른 여성이 뭉쳤을 때 힘과 탄력을 갖는다. 159쪽

사랑의 순간이 뜨거웠을수록 이별의 고통은 크다. 왜 사람들은 그 고통을 견디지 못하고 사랑의 순간들까지도 훼손하는 것일까? (…)
우리는 처음 사랑을 시작할 때 서먹서먹하지만 설레는 마음으로 상대에게 주춤주춤 다가간다. 그 아름다웠던 순간들, 인생에서 많지 않았던 그 뜨거운 사랑의 순간들을 잿빛으로 만들지 않으면서 우리는 이별을 맞아야 하고 고통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모든 사랑했던 순간들에 대한 예의고 또한 이별의 예의다. 193쪽

말과 글 때문에 흥미를 느꼈던 사람을 직접 겪어보았을 때 실망하는 것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의 말과 글은 방귀나 다름없다고 할 수 있다. 방귀와 같은 말과 글은 세상에 널려 있다. 소리 나는 방귀는 피해갈 수도 있지만 소리도 안 내고 거의 똥 수준에 가까운 방귀를 뀌면서 주변을 혼란시키는 사람들도 많다. 냄새와 해악이 지독하다. 의사들은 방귀는 건강과 별 상관관계가 없으며 어떤 똥을 누느냐가 중요하다고 한다. 어떤 똥을 누느냐에 따라 육체의 건강 상태를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인격과 정신의 건강 상태를 가늠해볼 수 있는 기준이 될 수밖에 없다. 205쪽

사람이 누군가를 알게 된다는 것은 정신 속에 그 사람이 지문으로 남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무런 지문도 남기지 못하고 간 사람이 있는가 하면 우연히 길거리에서 본 어떤 중년의 피곤한 얼굴이 두고두고 마음에 남아 있기도 하다. 단 한 번 만났을 뿐 다시는 만날 일이 없는 사람인데도 정신의 어느 갈피엔가 간직되어 있다가 문득문득 나의 삶에 어떤 중대한 발언을 하고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기도 한다. 349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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