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지독한그러나너무나정상적인혼란
카테고리 정치/사회 > 사회복지
지은이 울리히 벡 외 (새물결, 200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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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물받은 책이다. 꽤 오래 전부터 읽고 싶었다. 이 책과의 기억은 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책을 읽고 쓰기 시작하던 때였다. 서평 관련 온라인 동아리를 찾다가 네이버에서 한 곳을 발견해 글을 올렸다. 여느 동아리처럼 회원들 간의 정기적인 모임 자리가 열렸고, 큰 마음 먹고 참석했다. 이삼십대 직장인이 대다수였던 그 모임에서 각자 지난 한 해 동안 가장 인상깊게 읽은 책 한 권을 소개했다. 소개된 책은 다른 참석자에게 나누어졌다. 나는 김애란 소설집 <침이 고인다>를 가지고 갔던 걸로 기억한다. 내 또래의 한 여성은 <그리스인 조르바>를 들고 왔는데 손때가 묻어 여러 사람이 탐을 냈다(결국 내 수중에 들어 왔으나 ㄱㄴㅍ가 프랑스 유학길에 분실). 열댓 권의 책과 그 소개말 중에 가장 인상적이었던 책이 바로 길지만 매력적인 제목의 이 책이었다. 책을 가지고 온 분은 짧은 목과 짙은 화장이 인상적인 한 여성이었다. 자신의 고민과 삶에 너무나 딱 들어맞는 책이라 여러 번을 다시 읽었다고 했다. 가족과 직업 사이의 충돌, 연애의 어려움, 결혼, 등등. 다른 여느 사람들보다 열정적으로 책을 소개하는 모습에 깜짝 놀랐다. 당시 수중에 들어오진 못했지만, 마침내, 결국 이렇게 읽는다. 

1990년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1999년에 국내에 번역됐다. 책의 무대는 1980년대 독일이고 2000년대 초 한국에 소개된 셈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책이 2판 6쇄이니 10여년 동안 꽤 많은 사람들이 읽었다. 책이 담고 있는 삶과 책을 담을 삶 사이에 20여년 가까이 터울이 있는 셈이다. 

이 20년이 두 사회에 딱 들어맞았다. 20여년 전 독일 사회에서 일어나고 있던 일이 2000년대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양성의 경제적 격차가 좁혀지기 시작하면서 이혼율이 증가하고 연애 결혼이 보편화되었다. 동시에 자녀 양육비융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급증해 출산율이 급격히 하락했다. 적어도 연애 관계에 있어서만큼은 여성의 목소리가 상당히 반영되는 듯 보였다. 이전의 보편적 가족 형태였던 4인 핵가족 가구 비율이 줄어들면서 미혼이거나 노인 독신 가구와 한부모 가구의 비율이 급증하고 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전 세대에 비교하면 '사랑'은 거의 모든 대중문화에 등장하는 주제가 되었다. 적어도 언어화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두 사회가 겪고 있는 혼란, 고민거리는 놀랄 정도로 유사하다.

사랑만큼 사적인 관계는 없다고들 생각한다. 그런데 사랑만큼 보편적인 대화 거리도 없다. 친구, 가족, 티브이, 신문까지 우리가 접할 수 있는 거의 모든 매체가 사랑을 다루고 있다. 이런 현상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만큼 우리가 사랑을 모른다는 것. 30여년 전 세대만 해도 사랑을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진 않았다. 그들이 우리보다 많이 알아서가 아니라, 가족과 사회가 제공하는 양식과 관습(구체적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질서')에 (대개 무의식적으로) 수용함으로써 특정 개인이 고민하여 결정할 여지가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저자들은 오늘날 범람하는 사랑 고민이 본질적으로 나쁜 현상은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자본주의 산업화에 따라 여성의 경제력이 확보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일('개인화')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요즘 사람들은 사랑을 하여간 무지하게 고민한다. "커플들은 공동의 명분을 만들어내고 추구하기 위해서, 즉 그들의 자유로운 사적 공간을 사랑과 결혼에 대해서 서로 양립될 수 있는 개념들로 채우기 위해서 계속 대화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은 엄청난 노력과 시간, 인내력, 특히 '관계맺기 작업'으로 이름붙일 수 있는 자질들을 요구한다.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이며 종종 거의 헛수고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매번 동의에 이르고 나면 해결해야 할 또 다른 논쟁이 등장하기 때문이다."(169쪽) 일정 부분 학습된 양식을 수용하며 살지만, 오늘날 대부분의 결혼은 두 사람이 전적으로 선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여전히 선택과 협상의 연속이다. 살면서 대화나 관계맺기의 기술 같은 걸 특별히 익혀본 적 없는 보통 사람들이 결혼 이후의 삶에서 어려움을 겪는 것도 당연해 보인다. "친숙한 습관을 고수하는 일은 해결해야 할 극단적 문제들이 없는 한에는 아주 쉽지만 선택행위는 적극적인 논쟁을 통해 정당화해야만 한다. 따라서 이미 결정되어 있는 결혼은 참을 수 없을 정도만 아니라면 그럭저럭 받아 들일만 하겠지만 자유롭게 선택한 결혼은 모든 가능성 중에서 '최상의' 해결책이라는 것을 입증해야만 한다. 따라서 자기 선택을 정당화해야 하는 것이 행복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각자의 기준들을 자꾸 높여가도록 만드는 것이다."(175쪽) 이전 시대와 달리 스스로 결정한 결혼이므로 그만큼 더 행복해야 한다는 강박이 존재한다. 사회, 제도, 가문과 부모 탓을 할 수가 없어졌다. 나는 행복한가를 자꾸 점검한다.

개인에게 지나친 짐이 지워졌다고도 볼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살아가는 법, 가족과 가정을 꾸려나간다는 것, 아이를 기른다는 것, 이에 대처하는 삶의 지혜를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티브이와 종교 공동체 정도를 제외한다면. 사례 하나를 들어보자. 어느 케이블 채널 프로그램 중에 파국 직전에 이른 젊은 부부의 화해 과정을 다루는 상담 프로그램이 있다. 함께 프로그램을 시청한 친구들은 '다 짜고 한 것 이니냐, 저런 우스운 방법들(부부가 같이 춤 배우기, 무인도 극기 훈련 등)로 단기간에 부부 관계가 회복될 수 있겠냐'고 비웃곤 했다. 그렇지만 나는 젋은 부부들의 모습이 오늘 한국 사회의 꽤 보편적인 현상인 것처럼 보였다. 가장 단적인 증거가 바로 높은 이혼율이다.

이 프로그램에서 중요한 점은 대부분의 부부들이 실제로 나아지는 것처럼 보인다는 데 있다. 나는 그러한 변화가 조작된 게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들의 말투와 표정, 눈빛이 진심인 것 같았다. 프로그램은 춤 배우기나 무인도 극기 훈련 같은 자극적인 장면을 주로 보여주지만 사이사이 부부가 함께 전문가의 상담을 받고, 서로 솔직하게 대화하도록 만든다. 전문가들은 그리 독창적이랄 것도 없는 조언을 제시한다. 그러나 이 평범한 조언들이 참가자들의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적절히 제시될 때 그들은 미처 몰랐던 사실을 이제야 알게 되었다는 듯 수긍한다(배운다). 결정적으로 그들은 카메라(3자의 눈의 개입)를 통해서 스스로를 객관화할 수 있는 계기를 갖는다(완성된 영상물을 통해 실제로 그렇게 된다). 자기 객관화는 '반성'의 출발점이다('다큐멘터리 개청춘'). 그제야 겨우, 게다가 티브이 프로그램을 통해서야 '가족'에 대해 고민하고 스스로를 객관화하며 반성하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오늘날의 청춘들에게 '사랑' 말고는 기댈 곳이 별로 없다. 생활에 필요한 정보는 온라인 게시판에서 주고받을 뿐 소속감과 안정감을 주는 지속되는 관계의 장 - 공동체는 찾아볼 수 없다. 미래는 너무 불안하고 불투명하다. 그래서 사랑, 이래도 사랑, 저래도 사랑. "(...) 이러한 사랑이 없다면 자칫 실용적 해결책과 편리한 거짓말이 횡행할 세계에서 그것은 진실해질 수 잇는 유일한 기회를 마련해주는 것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자 진실로 나와 네가 접촉해 몸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며 뒤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서로가 만나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과거의 현재를 이해하고 확인하며 후원하려는 갈망이다. 또 가정에 대한 갈망이자 현대 생활이 낳는 의심과 불안에 대항할 수 잇는 신뢰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안전하지 않다면, 심지어 오염된 세계에서 숨쉬는 것조차 위험하다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갑자기 이러한 꿈이 악몽으로 뒤바뀌게 되더라도 마찬가지다). 301~302쪽" 사랑은 현대 사회에서 가장 핫한 취미, 가장 보편적인 소재, 가장 손쉬운 행복의 묘약 같아 보인다. 동시에 사랑은 어느 시대보다 막막하고 어려운 것, 상담과 가르침의 서비스가 범람하는 상품 시장이 되어 버렸다. 대가족과 관습의 자리에 전문가와 시장(market)이 들어앉은 셈이다. 과거를 그리워할 수는 있어도 되돌아갈 수는 없다. 결국은 우리에게 남겨진 몫이다.

나는 가정이 성소, 즉 재미와 즐거움만이 넘쳐나는 장소라고 보지) 않는다 - 물론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그보다는 가장 야만스러운 피조물인 인간이 다른 사람들과 비폭력적이고 비파괴적인 방식으로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 함께 사는 사람에게 자신을 완전히 드러내고 동시에 한 사람이 그(그녀)의 개성, 인간사, 희망과 공포를 알아감으로써 그가 만들어 내었던 이미지를 수천 개의 조각들로 깨버리는 일은 ... 오래 걸리고 매우 고통스러운 경험이다. ... (이런 의미에서) 결혼과 가족 생활은 ... 삶의 오물통과 마주하기에 ... 훌륭한 장소이다.
그래서 나는 26년 6개월 동안의 결혼 생활을 하고 나서 결혼의 목표가 행복이 아니라는 결론을 얻었다. 결혼은 훌륭한 면을 많이 갖고 있다. 그것은 성별과 가치관과 관점과 나이가 다른 사람들과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 결혼은 증오심을 극복할 뿐 아니라 증오할 수 있는 곳, 웃고 사랑하고 의사소통하는 것을 배우는 곳이다. Jourard 1982:177-179, 172쪽에서 재인용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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