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상목공소상상력과창의성은어떻게형성되는가
카테고리 인문 > 인문학일반
지은이 김진송 (톨,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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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총체적 감상 한 줄. '이런 책은 처음이다'.
룰루룰루님 블로그에서 알게 됐다. 2년여 동안 블로그를 드나들며 그동안 올라온 거의 모든 글을 읽었는데 이 책만큼 칭찬이 자자한 책은 드물었다. 발췌가 드문 분인데 적지 않은 분량을 발췌하셨다.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의 저자. 언젠가 꼭 읽어봐야 겠다고 마음먹었다. 몇 달이 지나 이동도서관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열 권이 넘는 책을 서랍에 쌓아 두었지만 인연을 놓쳐선 안 되겠다 싶었다. 그 결과는? 총체적 감상에서 보듯, 대만족.

어떤 점에서 '처음'인가 하면. 먼저, 저자는 목수다. 미술평론가 및 전시기획자로 일하다 마흔 가까이 되는 나이에 목수가 되었다. 목수가 된 이후의 일상을 담은 책을 2000년대 초반에 펴냈고 책은 곧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나무 작업을 계속 하며 몇 권의 책을 냈고 작업물을 가지고 전시회를 열었다. 그밖에 한국 근현대 미술과 문화를 다룬 책을 여러 권 썼다. 이상은 앞날개의 저자 소개말을 요약한 것인데 마지막 문단에서 (아마도) 편집자는 저자를 '정신과 물질, 이론과 경험, 사유와 행동을 분리시키지 않는 우리 시대의 드문 지식인'이라고 평가한다. 낯간지러울 정도의 찬사다. 책을 읽고 났으니 내 생각은? 나 역시 꽤 낯간지럽긴 한데, 틀린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 책 역시 이전의 저작에 이어 자신의 나무 작업과 관계된 산문집이다. 그런데 굉장히 독특하다. 일반적으로 목수 하면 집을 짓는 대목이나 가구 등을 만드는 소목에 포함된다. 저자도 소목으로 나무 작업을 시작했다. 의자나 책상 따위를 만들고 시장에 갖다 파는 장인. 그러던 어느 날 불현듯 떠오른 악몽에서 책은 시작되었다. 자신의 악몽을 물질로 구현해보고 싶다는 상상을 하게 된 것이다. 꿈은 이미지로 이루어져 있다. 이미지에 시간을 엮어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까진 머릿속에서 손끝까지의 과정으로 가능하다. 이굴 구현하되 가장 손쉬운 형식인 영상이 아니라 나무에 손을 대어 직접 만들어 보겠다는 것. 

영상이 그렇듯이 정지된 이미지를 움직이도록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필요하다. 처음, 이미지에 시간을 집어넣는다는 것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시간은 물리적인 실체가 아니라 추상적인 개념이다. 하지만 시간을 물질로 바꿀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지 못하면 사건은 스틸 사진처럼 단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다. 그에 비하면 이야기 아니 글은 얼마나 단순한가? 글은 시간의 친구다. 그리고, 그러다가, 이윽고... 간단한 접속사 몇 개만으로도 사건의 마차바퀴는 구르기 시작하고 단어와 문장이 연결되면 시간은 저절로 물길을 열어준다. 15쪽

이야기를 기계'로' 만들겠다는 것. 조그만 사람과 개와 책상과 술병과 술잔을 직접 깎고 톱니바퀴와 도르래를 잇고 동력원이 될 손잡이를 만든다. 손잡이를 돌리면 사람과 책과 개와 토끼와 벌레가 순서대로 움직이며 꿈틀대는 기계 상자를 혼자 힘으로 만들기 시작한 것이다(최종 작업물 전부와 사진 몇 장이 흑백 사진으로 깔끔하게 삽입되어 있다). 이미지(시각적 상상력)를 이야기(서사적 상상력)화하여 기계(논리적 상상력)로 만들겠다는 생각은 곧 뒤죽박죽되어 버린다. 이야기에서 이미지로 기계를 만들다가, 오히려 벌레의 꿈틀거리는 동작 자체를 구현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이미지와 이야기를 덧씌우기도 하고, 단순한 동작을 반복할 뿐인 기계 상자가 갖는 이야기의 한계를 넘어 보는 이마다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는 기계 만들기로 나아간다(개인적으로 마지막 상상의 결과물인 '비밀의 집'이 가장 매혹적이었다). 작업이 이어지는 과정과 저자의 사유가 착착 맞물리며 글로 기록된다. 정말 매혹적이다. 반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논리적 상상력은 시각적 상상력이나 서사적 상상력을 구조화하는 도구이다. 어쩌면 그것은 예술적 상상력에서 가장 결핍된 상상력의 범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게 없으면 간단한 서사적 풍경도 무너져버릴 수 있으며 미학적 효과도 제대로 발휘될 수 없다. 45쪽

작업이 점점 더 복잡해지고 그 대상을 바꿔감에 따라 저자의 사유가 심화되고 주제를 옮겨 가는 과정이 아주 매끄럽다. 머릿속 이야기와 이미지에서 시작된 작업은 자연의 움직임을 모방.구현해내려는 과정으로 나아간다.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논리적 상상력'에 보다 집중하게 된 셈이다. 꽃의 번식 과정에 궁금증을 느껴 책을 뒤져보고, 각각의 꽃이 벌레를 유인하기 위해 꽃잎과 생식기를 어떤 형태로 배치하고 있는지 관찰한다. 벌레가 보다 매달리기 쉽도록 내부를 꾸미거나, 아예 양으로 승부를 보거나, 등등.

숲 속으로 들어가 벌레와 나무를 보는 것과 도심으로 가 빌딩숲과 그 사이를 기어다니는 기계들을 바라보는 것에서 똑같이 살아 있음에 대한 경이로움을 느끼곤 한다. 물론 같은 느낌으로 다가오지는 않는다. 하나는 끊임없이 뒤바뀌며 매번 다른 풍경을 현란하게 연출하는 변화에 대한 두려움이 크고 다른 하나는 천천히 그러나 수만 가지의 변화를 조금씩 연출하는 세계에 대한 놀라움이 더 크다. 이상하게도 내가 몸을 담고 있는 문명의 세상은 나의 정체성을 흔드는 혼란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세계이며, 나와 다른 수많은 타자들로 이루어진 또다른 세상인 자연은 나의 정체성을 더 분명히 각인시키는 세계이다. 100쪽
 
저자 자신이 학자에 가까운 일을 오랫동온 해온 경험이 있다. 그런 경험과 나무 작업을 하는 동안 배우고 부딪히며 얻은 경험은 저자만의 훌륭한 재산이다. 다음과 같은 생각들을 우리에게 들려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로는 그리 독창적이지 않을지 모르지만, 책 속에서 그의 생각은 놀라울 정도의 설득력을 가지고 다가온다.

기호화된 이론적 지식을 추구하는 까닭은 원칙을 발견하고 그걸 보편적으로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근거를 만들기 위해서이다. '다음에 있을지 모를 누군가'를 위한 원칙을 발견하는 일은 '지금 적용할 수 있는 능력'과 다를 수 있다. 지식인과 노동자는 그렇게 구분된다. 하지만 달랑 이론적 지식 그 자체만을 알고 있다면 쓸모없는 지식의 허울은 늘어가고 그만큼 지식에 대한 회의도 늘어난다. 259쪽

현대인은 배움에 중독된 동물이다. 배움에 관한 수만 가지의 좋은 말들을 다 제쳐두고 거칠게 표현하자면, 배움이란 무엇을 할 수 있다는 심리적 위안을 얻기 위한 것이거나 무엇을 할 수 없다는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한 것일지도 모른다. (...) 배움보다 더 앞서야 할 것은 생각이다. 스스로의 생각으로부터 배우지 못하는 사람은 남에게 배워서도 알지 못한다. 꼭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배워야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그 일의 필요성이 덜하거나 일을 할 생각이 처음부터 없는 사람이기 쉽다. 맞는 말인지 모르겠지만 내 주위에서 본 경험으로 얘기하자면, 대체로 생각하기를 귀찮아하는(때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더 배우려 든다. 아무 생각 없이 배우기만 하면 무언가를 알게 되리라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이다. 그건 책을 읽고 생각하지 않으면 그저 책을 소비한 것과 같은 이치다. 적어도 책을 읽는 시간만큼의 생각할 시간을 갖지 않는다면 책은 읽으나 마나다. (...) 배움의 즐거움이 아니라 일의 즐거움을 누리고 싶다면 그냥 하면 된다. 어떤 일을 배우고 난 다음은 이미 그 일을 잘할 수 있는 많은 능력을 잃어버리고 난 뒤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그 일을 하면서 발견하게 될 수만 가지의 즐거움을 다 빼앗겨버리고 난 뒤일지도 모른다. 276~278쪽

고백하자면 책의 내용 중 절반 하고 나머지 절반 정도만 이해할 수 있었다. 기록된 현실과 별개로 텍스트로서 이 책의 가장 큰 매력은 매끄러운 구성이다. 그 과정을 착착 따라가는 게 조금 버거웠다. 언젠가 여유가 된다면 사서 갖고 싶은 책이다. 그의 이전 저작을 찾아 읽는 건 물론이고. 덧붙여, 책 뒤표지의 소개 문구들은 꽤 촌스럽다. 틀린 말은 아니다만 어쩜 이리 재미없게 써놨는지.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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