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을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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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용철 (사회평론, 20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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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부터 읽어 봐야지, 읽어야지, 했던 책이다. 2만 2천 원이라는 가격에 여러 번 망설였다. 그리 비싼 것도 아닌데. 지난달, 큰마음 먹고 칼 폴라니의 <거대한 전환>을 사러 신촌 홍익문고에 들렀다. 폴라니 책의 번역판은 상상외로 비쌌다. 허탈해진 마음으로 서가를 둘러보다 이 책을 보자마자 샀다. 

책에 얽힌 사연은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지은이 김용철 씨는 검사 출신으로 1997년 8월 삼성에 입사했다. 삼성 비서실(당시 구조조정본부, 현 전략기획실)에 입사하여 법무팀과 재무팀 등에서 7년여 동안 일했다. 2004년 8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과 함께 2007년 양심고백을 통해 삼성 비리를 한국 사회에 알렸다.

책이 나온 것은 2010년 2월이다. 양심고백 이후 일련의 소송과 판결, 보도, 시끌벅적한 공방과 소문 등이 모두 가라앉은 다음이다. 삼성은 여전히 대한민국 1위 재벌이고, 계열사 삼성전자는 애플의 아이폰보다 더 많은 스마트폰을 팔아 치우는 세계 굴지의 전자 회사이다. 그가 삼성전자나 기타 삼성 그룹의 경영 현장에서 얼마만큼 실적을 쌓았는지는 별개로, 장남 이재용 씨는 삼성 스마트폰의 제작 발표회 등 주목받는 현장에 나서며 후계자로서의 입지를 쌓아가고 있다. 나 같은 소시민이 삼성불매운동에 동참하겠다며 삼성이 만든 노트북이나 스마트폰 따위를 가지 않은들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다. 정말로 그럴 것 같다.

책을 읽고 나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시민 극소수가 삼성불매운동에 동참하고 있는지 (적어도 심정적으로는)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해와 행동은 별개의 문제이다. 책을 읽은 모든 독자가 '그래, 나도 삼성이 만든 물건은 사지 않을 거야'라고 결심하진 않을 것이다. 삼성이 만든 전자제품은 품질이 우수하고, 국내 애프터서비스가 매우 편리하다. 어떤 사람들은 그룹 총수와 그 일가의 범법.비리 행위를 그룹 소속 기업의 생산 활동과 분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아주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럴 일은 아마 없겠지만) 삼성불매운동이 지구촌 전역으로 들불처럼 번져 삼성그룹 전체가 폭삭 무너지고 만다면, 피고용인들의 일자리의 생계를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이 있을 리 없다. 회사가 무너지는 것은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다.

김용철 변호사의 말에 따르면 10조원 가까이 되는 삼성 비자금은 대부분 그룹 계열사들이 각출해서 마련한 돈이라고 한다. 많이 버는 곳은 그만큼 많이 내는 식으로 말이다. 엄연히 생산 기업의 이익으로 계산되고, 법률에 따라 주주들에게 배당되거나 기업 설비 투자, 노동자 급여 등의 형태로 쓰여야 할 돈이다. 실제로 더 좋은 제품을 만드는 데 공헌한 사람들, 삼성을 여기까지 키워낸 사람들에게 돌아가야 할 돈이 그룹 총수 일가의 생일잔치 비용이나 비자금으로 쓰였다. 

 
기업은 특정 사회의 물적.지적 발전을 기반으로 삼아 활동하는 경제 주체이다. 삼성도 다르지 않다. 애국심이라는 무형의 자산은 특정 기업 제품이 국내에서 자리 잡는 데 매우 큰 도움이 된다. 세계적으로 성공한 한국 기업에 대한 사람들의 자부심은, 삼성의 국내 활동을 더욱 편리하도록 돕는다. 이러한 것들('신뢰'라 부를 수 있는 사회적 자산)은 오랜 시간에 걸쳐 역사적으로 만들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이러다 삼성이 한국을 떠날지도 모른다'며 삼성을 비판하는 이들을 비난한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생각했을 때 삼성이 그룹의 핵심 부분을 해외에 이전시키기란 불가능하다(이미 생산 공장 중 다수는 해외에 있지만). '신뢰'라는,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자산을 기업은 포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삼성자동차 부도 사태 같은 사례만 보아도, 정부가 나서서 국민 세금으로 공적 자금을 투입하여 기업의 손실을 메워주곤 했다. 한국 사회에서 기업은 소유주의 것이라는 생각이 상식처럼 통한다. 하지만 기업은 사회로부터 아무런 책임을 지지 않는, 자유로운 세계 시민이 아니다.

다시,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한 명의 시민이 특정 기업에 영향을 미치고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가장 건전한방식이 바로 구매 행위이기 때문이다. 기업은 오직 판매와 이를 통해 획득하는 이윤에 의해서만 움직이는 집단이므로. 미약한 데다 뜻한 바를 이루지 못할 것이라는 지적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그 말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한다. 아무 것도 안 하는 것보단 낫기 때문이다. 그밖에 달리 할 만한 게 지금으로서는 딱히 눈에 띄지 않기 때문이다. 열불 터지게도.  

한 사회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쥐고 있는 집단이 구체적으로 어떤 생활을 누리는지 엿볼 수 있다. 김용철 변호사의 목격담은 그래서 흥미롭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을 수도 있다. 믿는다 해도 그것을 가지고 이건희 일가의 범법.비리 행위와 연관지어 비판할 근거는 없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았던 사실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가 어떤 것을 상대하고 있는지 알아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싸움은 적을 아는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주위 친구들에게 이 책을 읽고 있다는 이야기를 했더니 "아 김용철 그 사람, 배신자 아냐?"라는 대답이 순식간에 돌아왔다. 마치 상처 입은 것처럼 깜짝 놀랐다. 이 천진난만한 친구들은 김용철 변호사를 '배신자'로 정의내림으로써 자신이 그로부터 배신당한 이의 편, 즉 삼성의 편에 서 있음을 고백했다. 그리고 한국의 보통 시민들 대다수가 이 친구들과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경제라는 물신을 숭배하며 불의, 타인의 고통, 부당함을 침묵하고 용인해온 우리 역시 공범이나 다를 바 없다. 책 말미에 부록으로 실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의 성명과 기자회견문을 읽으면서 머릿속이 복잡했다. 한 종교의 성직자 집단이 이 모든 일을 책임지고 나섰다는 사실은, 한국 사회에서 삼성의 권력이 얼마나 강력한지를 웅변하며 동시에 그 밖의 모든 집단이 얼마나 미약하고 부패해 있는지 보여준다.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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