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도서관책과영혼이만나는마법같은공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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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알베르토 망구엘 (세종서적,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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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 관한 이야기. 우리에 관한 이야기. 책 읽기가 내게 일깨워준,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경험'에 대해서 써볼까. 

알베르토 망구엘 씨는 프랑스 남부의 한적한 시골에 자신의 도서관을 마련했다. 오래된 헛간을 개조하여 도서관으로 삼았다. 주인을 따라 지구 여러 곳을 옮겨 다녔던 책들은 한동안 제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을 것이다. 그는 낮에는 질서를 상기하며 읽고 쓴다. 밤이 되면, 도서관은 마치 한 척의 배처럼 혼자 불을 밝힌다. 그러한 밤에는 두서없이 이 책 저 책을 뒤적이고, 고요히 상념에 잠기기도 한다. 저자는 책에서 인류가 가졌고, 가지고 있고, 가졌을 법한 온갖 종류의 도서관의 역사를 소개하고 있다. 숱한 문장과 구절을 발췌했으나 마지막에 가서 내 머릿속에 남은 것은 하나의 장면, 밤의 도서관의 모습이었다. 바다 위에 떠 있는 한 척의 배 같은 도서관.

내 도서관에서도 어떤 책을 꺼내 어느 페이지를 펼치더라도 세상에 대한 나만의 비밀스런 경험을 완벽하게 이야기한 구절을 찾아낼 수 있다.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의 사서들도 알았겠지만, 문학에서는 한 순간이 다른 모든 순간을 함축한다. 38쪽

얼마 전 남산도서관에 처음 가보았다. 아마 밤이 되면 그 도서관도, 마찬가지로 홀로 밝을 것이다. 어둠이 산을 찾고, 그 산 아래로 서울 도심의 풍경을 내려다볼 수 있을 것이다. 대로를 달리는 충혈된 눈빛과, 골목을 드러내는 동그란 빛들로 아름다울 것이다. 내게 가장 익숙한 도서관은 다니던 대학교의 도서관이다. 그 도서관만큼은 대학에 적을 둔 6년여 동안 언제나 좋았다. 작은 구릉 꼭대기를 둘러 선, 두 번 안으로 꺾은 기다란 선분 같은 모양의 도서관. 밤이 찾아오면, 정말로 배 같아 보이고, 어쩌면 우주선 같아 보이기도 한다. 늦은 밤까지 공부하다 잠깐 밖에 나와 도서관을 보고 있으면 따스함 같은 걸 느끼곤 했다.

물질로서의 책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경계했었다.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라는 일본 소설을 읽은 적 있다. 한 장면만은 아직 어렴풋이 기억한다. 한 아이가 말한다. 책들을 풀어줘야 한다고. 탐욕스러운 수집가의 손에서, 책장 구석에 쳐 박힌 채 읽히지 않는 책을 사람들의 손에 들려줘야 한다고. 다시 읽을 것 같지 않은 책을 책장에 굳이 꽂아둘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혹시 나중에 다시 읽고 싶거나 읽을 필요가 생기면, 도서관에서 빌려 보거나 다시 사면 된다. 언제 사라질지 모를 동네 서점(혹은 헌책방)에서 책을 산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서평의 수가 늘면서 이전에 읽었던 책을 언급하는 일이 점점 많아진다. 다행스럽게도 매번 서평을 웹에 남겨 놓아 언제든 참조할 수 있다. 하지만 가끔 원문을 당장 확인하고 싶은 경우에는 조금 곤란하다. 이미 그 책은 친구에게 선물로 주었거나 어딘가의 헌책방에서 다른 책으로 바꿔버렸기 때문이다. 처음의 마음가짐과 달리 그럴 때면 도서관을 찾아가야겠다는 생각은 그리 매력적이지 않아 보인다. 그냥 넘어가지 뭐, 관련된 부분을 쓰지 말지 뭐, 그러고 만다. 드물지만 필요에 의하지 않고 이미 읽은 책을 다시 읽고 싶어지는 때도 있다. 이 경우에는 그래도 나중에 찾아 읽곤 하는 편이다. 

서재는 그 주인, 즉 그곳을 독점적으로 사용하던 독서가에게 '에우테미아(euthymia)'를 준다. 세네카는 에우테미아가 '영혼의 행복'을 뜻하는 그리스어라고 설명하며, '트란킬리타스(tranquillitas, 평온)'로 번역했다. 모든 서재는 궁극적으로 에우테미아를 갈망한다. 에우테미아는 방해받지 않는 기억이며, 글을 읽는 시간의 편안함이다. 요컨대 공동체원과 함께하는 날에도 갖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우리가 책을 읽는 사적인 공간에서 추구하는 것이다. 윌리엄 블레이크는 말한다.
"사탄도 찾아내지 못하고, 사탄의 감시원들도 찾아내지 못하는
순간이 매일 있다. 그러나 부지런한 사람들은
그 순간을 찾아내 배가하리라. 그 순간을 찾아내고
적절히 사용한다면 하루의 그 순간은 매일 새로워지리라." 196~197쪽

책이 있는 방, 책상 위 스탠드를 밝히고, 딱딱한 의자에 앉아 책들을 바라본다. 혼자, 조용히. 읽고, 사전을 뒤적이고, 쓰고, 읽는다. 그러다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면 저 아래로 사람의 동네가 보인다. 나와 같은, 수백 수천 명의 인간이 저기 있다. 다시 이 작고 따뜻한 곳으로 돌아온다. 나는 혼자여서 외롭고 소리 내어 대화를 나눌 사람이 곁에 없어 쓸쓸하다. 동시에 그런 때와 장소에서만 가능한 세계에 존재한다. 내 영혼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내게 진실로 소중한 사람들을 선명하게 그리워할 수 있는 세계. 그 순간 나는 정말로 살아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책이란 내게 읽을거리이면서 쓸 거리이다. 허공에 늘어진 동아줄 같은 것이다. 어디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모르는. 삶을 여기 그대로 멈추어 있지 않게 만든다. 책 읽기에서 시작된 일상적인 모든 것 - 읽고 쓰기 위해 혼자 있는 시간들, 사랑하게 된 소중한 공간, 내 안에 축적된 독서의 흔적, 이전에는 없었던 현실의 기시감들 - 은 조금씩 확실하게 나를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있다, 고 믿는 중이다.

새 책이든 헌 책이든, 내가 책에서 항상 지워버리려고 애쓰는 유일한 표식이 있다면, 심술궂은 책 장수가 책의 뒷면에 단단히 붙여놓은 책값 스티커이지만, 성공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 고약한 하얀 스티커는 잘 벗겨지지 않기 때문이다. 꼭 문둥병처럼 끈적이는 흔적을 남겨 먼지와 보푸라기가 달라붙게 된다. 그런 스티커를 발명한 사람이 끈적거리는 지옥에 떨어지기를 두 손 모아 기도하고 싶은 심정이다. 26쪽

알렉산드리아와 그곳의 학자들은 과거의 진정한 속성을 잘못 해석하지 않았다. 그들은 과거가 매 순간 달라지는 현재의 근원이라는 걸 알았다. 새로운 독서가는 과거의 책을 집어 들지만, 책을 읽는 과정에서 과거의 책이 새로운 책이 된다는 것도 알았다. 따라서 모든 독서가는 어떤 책에 적절한 불멸성을 안겨주는 존재이다. 이런 점에서, 독서는 재탄생을 위한 의식이라 할 수 있다. 36쪽

전통적으로 고전이라 일컬어지는 책과, 우리가 본능과 감정과 오성을 통해 우리의 고전으로 삼은 책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간극이 있다. 그 책이 전통적인 고전이어도 마찬가지이다. (...) 또한 어떤 책이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후에 우리 손에 들어와도 근본적으로는 우리가 그 책을 처음으로 찾아낸 사람이 되며, 그 경험은 모래밭에서 프라이데이의 발자국을 발견하는 것만큼이나 놀랍고 예기치 않는 경험이 된다. 227쪽

독서가의 힘은 정보를 수집해서 정리하고 목록화하는 능력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는 눈으로 읽은 것을 해석하고 관련지어 생각해서 변형시키는 재능에 있다. (...) 각 종교의 진수를 담은 경전에서 확인되듯이, 지식은 텍스트나 정보의 축적에 있는 것도 아니고 경전 자체에 있는 것도 아니다. 지식은 텍스트로부터 되살려내 다시 경험으로 승화시킨 경험, 요컨대 독자 자신이 속한 세계만이 아니라 바깥 세계까지 보여주는 언어에 있다. 101쪽

우리는 도서관에서 배우고, 책을 읽음으로써 올바르게 질문하는 법을 터득한다. 그러나 우리가 책에서 반드시 답을 찾아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전해 들은 목소리와 상상으로 창조해낸 이야기를 통해서, 책은 우리가 직접 고통받지 않아 알지 못하는 것을 기억하게 해줄 뿐이다. 고통 자체는 희생자의 몫일 뿐이다. 이런 점에서 모든 독서가는 아웃사이더이다. 258쪽

그 괴물은 맹인 은둔자의 오두막에 들어가서는 "이렇게 무작정 들어와 죄송합니다...... 나는 약간의 휴식이 필요한 여행자입니다"라고 말한다. 325쪽
<실락원> 제3권, "창조주여, 제가 간청하더이까, 진흙으로 빚어 나를 인간으로 만들어달라고? 제가 애원하더이까, 어둠에서 저를 끌어내달라고?" 이 구절은 <프랑켄슈타인>에서 제명으로 사용되었다. 이 소설에 주석을 붙인 Leonard Wolf는 괴물의 감동적인 완벽한 말에 대해 "'이렇게 무작정 들어와 죄송합니다'는 인간을 위한 제명(혹은 묘비명)으로도 안성맞춤이다"라고 설명했다. 365쪽, 15장 '집' 미주 7번

세네카에 따르면, 우리는 우리의 것이라 부르고 싶은 책을 어느 도서관에서나 구할 수 있고, 독서가라면 누구라도 자기만의 과거를 만들어갈 수 있다. 세네카는 "우리가 부모를 선택하는 것은 아니다"라는 보편적인 가정마저 사실이 아니라고 주장했다. 달리 말하면, 조상을 선택할 권한이 우리에게 있다는 뜻이다. 언젠가 세네카는 자신의 서가를 가리키며 "저 서가에 고귀한 유산을 물려받은 가문들이 있다. 당신이 속하고 싶은 가문을 마음대로 선택하라. 그렇게 할 때 당신은 이름만이 아니라 재산까지 실제로 물려받을 것이다. 하지만 그 재산을 인색하고 째째하게 지키려고 해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과 나눠가질수록 그 재산은 더욱 불어난다...... 당신을 영원히 살아 있는 존재로 바꿔주지는 못하겠지만 당신의 죽음을 연장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 그것이다"라 말하고는 "이런 관계를 깨닫는 사람이면 누구나 인간의 한계에서 벗어난다. 모든 세대가 신을 섬기듯이 그를 섬길 것이다. 과거는 이미 지나가지 않았느냐고? 그는 과거를 기억 속에 단단히 붙잡아둔다. 지금 이 순간은 어떻게 하느냐고? 그는 현재를 이용한다. 앞으로 다가올 시간이 있다고? 그는 시간을 앞지른다. 이렇게 과거-현재-미래를 하나로 융합함으로써 그의 삶이 연장된다"라고 덧붙였다. 327쪽 

 
Posted by 권고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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